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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평점 :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의 경악할만한 소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삼대에 걸친 가족사를 격동의 도미니카사에 녹여냄으로써 외부적 요인에 노출된 개인의 굴곡 넘친 삶을 사실감 넘치게 그려냈다.
작품 속에서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를 담당하며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줄곧 견인하는 화자 유니오르는 작가 자신이다. 그는 데 레온 가족의 일상을 세밀히 관찰해온 그들 모두의 분신으로 가족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부끄럼 없이 쏟아내도록 안내하고 있다. 이런 형식은 도미니카 공화국과 미국 뉴저지에서 자란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되고 있다.
작가는 독재와 민주를 두루 경험한 바탕 위에서 특히 트루히요가, 오스카 와오의 조부 아벨라르가 딸을 파티에 데려오지 않은 데 앙심을 품고 아벨라르를 파멸해 가는 과정을 그리는 내내 감정이입적 표현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독재에 대한 조소를 더욱 고도화해간다. 그와 같은 방식은 직접적인 비난 보다 입가에 묘하게 흐르는 비웃음의 강도가 심리적 강도가 크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이 소설은 개인의 삶이 결코 시대상황과 분리될 수 없는 교호작용의 자장 속에 놓여 있다는 진리를 격랑과도 같은 삼대 가족사에 녹여내고 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본질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고통스런 검증'이자 사적 공간을 최고도로 구현하는 장치로서의 가족조차 시대와 조응하며 그 관계 속에서 진퇴를 거듭하는 '연약한 고리'라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오스카와 그의 누이 롤라, 모친 벨리시아, 조부 아벨라르로 이어지는 삼대는 가족이라는 연대감으로 충만하지만 그들 각자가 살아낸 삶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그럼으로써 파편적이다. 아벨라르의 몰락이 가족사에 그늘을 드리웠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이 생물학적으로 같은 혈통 내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들 모두 통제불가능한 시대상황 혹은 주변 상황에 부딪히고 저항하며 어두운 가족사의 한켠을 따뜻한 빛으로 채우려 분투했음에도 결과적으로 푸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존재라는 점에서 '부득이한 한계'를 말하고 싶다.
그 한계란 작품 초반에 등장한 '푸쿠'다. 푸쿠는 저주와 동의어로 쓰였다. 롤라의 '변해야 한다'는 강박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이유도 의미도 없이 그를 사로잡았다는 점에서 당연 푸쿠였다. 벨리시아의 비극적 출생과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던 사랑이 그에게 푸쿠였다면, 아벨라르에게 그것은 가족이냐 권력이냐의 선택의 문제였다. 오스카는 진정한 사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이본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화염에 휩싸였다. 그 또한 푸쿠였다. 각각의 푸쿠 위에 견고하게 드리워진 트루히요라는 푸쿠까지. 그들은 푸쿠를 이고 생의 끝을 향해 무한 질주했다. 마치 그것을 떨쳐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개별적인 삶의 형식을 보면 분명 그들은 후대와 연결됨 없이 푸쿠의 그늘에 갇혀 명멸한 인간이었음에도 그들은 가족이라는 공통의식 속에서 서로를 향해 따뜻한 시선을 거두려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가족의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공통점은 결과적으로 이 작품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공신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교묘하게 삽입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 공통점은 그들이 하나같이 삶을 포기하지 않은 데서 온다.
'절망 속의 긍정'은 어느 문학이나 삶에 감초처럼 드러나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들을 빛나게 견인하지만 이 작품에선 그런 법이 없다. 그들은 외견상 모두 실패한 군상으로 그려졌다. 그럼에도 그들을 푸쿠 아래 절망적으로 누인 자들로 기억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기어코 놓지 않은 '사파' 때문이다. 사파는 푸쿠를 피할 수 있는 역주문을 말한다. '평온하게' 화염에 휩싸이는 오스카에게서 그리고 가족을 택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권력을 손에서 놓은 아벨라르에게서 우리는 사파를 본다.
그들을 선택했다. 자기결정권을 손에 쥔 그들은 희망이라는 좌표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갔다. 그것이 이 작품을 눈부시게 읽히도록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 주노 디아스는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비롯해 미국비평가협회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1996년 첫 단편소설집 Drown을 출간한 후 11년만에 우리 앞에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들고 나타난 그에게 또 다른 작품을 기대한다. 또 다시 11년을 기다린다고 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