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글쟁이들 - 대한민국 대표 작가 18인의 ‘나만의 집필 세계’
구본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전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글은 삶의 총량에 비례한다." 수년 전 모 신문의 인터뷰 기사에 실린 말입니다. 당시 그 말을 한 분이 소설가인지 시인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짧지 않은 기사를 단지 그 말이 너무 좋아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진지한 삶은 공감을 동반합니다. 모양새야 가지각색이겠지만 그 속 내용은 대체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릴 만큼 닮아있다는 데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분명히 나와 같지 않은 타인의 삶임에도 그가 살아낸 삶의 이야기가 마치 나를 주인공으로 세워 꾸려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의 삶이 대체적으로 올망졸망한 조약돌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모가 나고 패이기도 한 돌이 매끄러운 돌로 변하기까지 숱한 바람과 물살의 간섭이 있어야 하듯이 삶 또한 그와 같이 여러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는 동안 다듬어진다는 것을 알아 가는 일이겠습니다.

 

어느 농부는 '짓는다'는 말이 좋다고 책에 썼습니다. 그의 말을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새삼 느끼지만 '짓는다'는 참 좋은 우리말인 것 같다. '만든다'는 말과는 느낌이 다르다. 밥을 짓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짓듯이 책을 짓는다. 무수히 많은 과정에 많은 사람의 땀과 노력이 깃들어 있기에 '짓는다'는 말이 나온 게 아닌가 싶다."

 

'만든다'는 말은 인위적이라는 냄새를 풍깁니다. '짓는다'는 어감 탓도 있겠습니다만 정감 어리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습니다. 밥을 짓고 집을 짓듯이 아기자기하게 삶을 꾸려갈 수 있다면 그 삶에서 건져 올린 두레박엔 갈증을 시원하게 해갈할 물이 넘쳐흐르겠지요. 많은 이들이 그 물을 마시며 지나온 길을 회상하고 앞날을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삶을 닮은 글은 또 어떨까요? 글이 글쓴이의 삶을 제대로 반영한다면 그 글은 읽는 이에게 가상체험의 효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비록 가상체험이 실제 체험에 견줄 때 몸 속 각인의 깊이가 옅을지 몰라도 정신적인 면에선 오히려 앞설 수 있습니다. 실제 체험은 그 일을 복기하기까지 적게는 수일에서 많게는 수년의 시간을 숙성기로 거친 다음에야 성찰의 기회를 갖는다는 점에서 즉시 또는 적은 시간 안에 되새김질이 가능한 가상체험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자주 글쓰는 이의 방을 기웃거리게 되는가 봅니다.

 

이 책, 〈한국의 글쟁이들〉엔 여러 개의 방이 손님 맞을 준비를 해놓고 있습니다. 고루 특색을 갖춘 방은 방문을 열 때마다 손님 얼굴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입 꼬리를 좌우로 길게 들어올리는가 하면 눈가에 초승달 같은 주름을 여러 갈래로 패이게 하기도 하고 때때로 고갯짓을 무한 리필하게 만드는 만큼 빨리 둘러보리라는 기대는 되도록 빨리 내려놓는 것이 유리합니다. 방 안엔 삶의 향취가 물씬 배여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방의 주인들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차에 적은 타이틀을 그대로 인용하여 그들을 소개하면, 국문학 저술가 정민, 미술 저술가 이주헌, 역사 저술가 이덕일, NGO 저술가 한비야, 동양철학 저술가 김용옥, 변화경영 저술가 구본형, 만화가 이원복, 자기계발 저술가 공병호, 과학칼럼니스트 이인식, 민속문화 저술가 주강현, 만화작가 김세영, 건축 저술가 임석재, 교양미술 저술가 노성두, 교양과학 저술가 정재승, 동양학 저술가 조용헌, 전통문화 저술가 허균, 서양사 저술가 주경철, 출판칼럼니스트 표정훈 등 그야말로 다채롭습니다.

 

각 분야에서 독특한 저술로 위치를 탄탄히 굳힌 그들은 그 자리에 이르는 동안 땀과 눈물의 수고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남다른 자질과 남다른 노력이 쌍두마차의 말처럼 거센 바람을 가를 차비를 차려야한다는 진리를 그들은 그들이 증언하고 있는 말과 말의 행간에 무수히 차려놓았습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등을 쓴 국문학 저술가 정민의 낭독에 얽힌 여담이 이채롭습니다. 그는 글을 쓰고 나면 가장 먼저 아내에게 낭독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읽다가 멈추면 멈춘 부분을 고치고 또 멈추면 그 부분을 손질하기를 여러 번. 마침내 입맛에 잘 맞는 글이 되고서야 그 일을 멈췄다고 하니 글의 리듬과 어미 각운을 꼼꼼히 따지는 그의 퇴고법이 소중한 삶을 의미 없이 배설하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데 그렇게 많은 수고와 노력을 쏟아 부어야한다면 삶이라는 등짐엔 얼마만큼의 수고와 노력을 얹어야 할지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일기장에 적힌 한비야의 다짐은 또 어떤가요? "머리를 때리는 글이 아니라 가슴을 때리는 글을 쓰자."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의 중국 견문록〉,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등 그의 대표적 여행기 세 권을 읽은 독자들이 서둘러 국외로 나갈 마음에 엉덩이를 한참 들썩인 데는 그만큼 그의 글이 그의 말마따나 독자들의 가슴을 때렸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리지도 않고 열매를 거두려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옹골차게 밭을 갈고 거름을 주려는 이들의 모습이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수고는 맺힌 열매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비록 그 때가 아직 멀고 당장 햇빛과 비가 충분치 않다 해도 좋은 밭에 뿌린 좋은 씨앗은 필시 좋은 열매로 화답한다는 믿음만큼은 어느 시대에나 동일하게 적용되어 왔습니다.

 

여기 실린 18인의 삶이 그와 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돌짝 밭을 종일 수고하여 고른 이들이며, 오래 묵힌 거름을 일일이 퍼내어 밭에 뿌린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글에 배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만만치 않은 무게감'은 남다른 삶에서 온다는 진리를 거듭 관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갑작스런 추위로 움츠러든 어깨를 곧게 펴고 내일을 바라보고 꾸준히 오늘을 일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 겨울에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그와 같은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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