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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를 만나다
메릴린 챈들러 맥엔타이어 지음, 문지혁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빛의 화가로 불리는 한 사내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있어. 널 너무 사랑한. 한 남자가 있어. 널 너무 사랑한" 보이쉬한 가성으로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그는, 사랑하는 대상을 달리하고는 있지만, 빛을 향해 끝없는 격정을 토해놓고 그 안에서 잠영한 화가였습니다. 그에게 빛은 다가서는 빛임과 동시에 시선을 끌어당기는 안식이었습니다.
명암이 공존하되 빛의 확산이 눈부신 작품 특징은 그가 1642년에 그린 《야경》을 정점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우며 이후 네덜란드 화단에 놀라운 영향력을 미칩니다. 비록 그의 최후는 임종하는 사람 없이 초라하게 스러졌지만 그의 작품 경향과 영향력은 회화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초라한 죽음과 눈부신 영향력의 대비는 빛과 어두움을 대척점에 둔 그의 작품 경향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빛과 어두움의 경쟁이 어디 그의 전유물이겠습니까. 하루가 떠오르고 저무는 이치가 그렇고, 일상에서 부딪히는 잦은 성공과 실패 또한 빛과 어둠의 양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만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는 엄연한 진리를 끊임없이 의심함으로써 어두운 기억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참혹하게 절망과 파멸로 이끌려갑니다. 어두움의 속성이란 그렇듯 그를 숭배하는 자들을 사로잡는 '어둑서니' 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 또한 언뜻 보면 어두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 8할이 그늘에 할애되어 있을 만큼 그는 그늘을 친숙하게 작품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늘에 대한 탐구가 어둠에 대한 숭배 의혹을 불러일으킬 만합니다. 쓸쓸했던 말년과 아내를 잃고 난 후 명성마저 사그라졌던 30대 중반 이후의 힘겨운 삶이 그런 의혹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그는 그늘 안으로 잠영하고 그 안에서 유영하는 유형의 인간형은 아니었습니다.
왼쪽과 오른쪽, 아래와 위 할 것 없이 의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빛에 휩싸여 있습니다. 작지만 눈부신 빛, 그 빛으로 인해 그늘은 자기 자리를 순식간에 내주고 있습니다. 당초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한 그늘은 채 2할의 영토도 차지하지 못한 빛을 통해 자신의 영토가 결국은 그 빛에 복무하는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감상자의 눈을 점령한 그늘이 빛에 의해 단박에 시선을 거두는 구조는 그의 작품에서 특징적인 구도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그늘은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힘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늘조차 희망이라는 작은 빛 앞에 가장한 존재의 크기를 거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늘은 필요악에 대구를 맞춰 존재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죄가 들어온 후 그늘은 우리 눈에 어둑서니처럼 보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소망이 비치지 않는다면 결코 물러날 것 같지 않은 어둑서니는 사실 손톱 만한 빛으로도 맥을 못 추는 형질을 타고났습니다. 두려움이 어둑서니의 속성을 가릴 뿐입니다. 화가는 그 점을 분명히 아는 듯합니다. 특히 종교화에서 보이는 그의 빛은 구원과 연결됨으로써 그가 빛과 그늘을 구원과 지옥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내비칩니다. 구원의 문제를 빛으로 형상화한 화가라는 별칭이 그에게 더욱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17개의 작품과 해설로 그를 전부 읽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한 화가의 집요한 탐구를 유연하게 풀어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림과 시와 설명이 상호 조응하며 독자에게 생각의 여지를 무한 리필하고 있습니다. 충분하지 않은 설명이 독자의 눈을 여백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다분히 의도된 그런 기획 의도는 미술작품은 해독이 어렵다는 통념에 균열을 일으키며 작품을 기계적으로 감상하려는 부담감을 상당 부분 벗게 합니다. 다만 도판의 질감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