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촉망받는 화가에게 닥친 불의의 일격. 그것은 한 평론가의 비평에서 비롯했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잇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그 비평이 실린 날부터 자신의 그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여류 화가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같은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귀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림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깊이 있는 그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던 그녀는 마침내 그림 그리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만다. 과연 깊이 있는 그림이란 무엇일까?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그는 그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같은 비평가의 평론이 신문에 실린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평론가가 무슨 말을 한 건가? 그가 그녀와 그녀의 작품에 대해 뱉은 말은 그녀와 그녀의 작품을 평론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 같을 뿐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평론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보면 평론이란 본디 비판을 내장하고 있는 법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혹여 우쭐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깊이가 없다는 사족을 붙였을 뿐, 맥락적으로 그녀의 작품에 대한 절대적인 상찬이라고 우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옳지 못하다. 평론이 그렇듯 엄밀한 기준없이 이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평가를 낼만큼 맹목적이냐 하는 것도 문제다. 그것은 평론가의 자질을 의심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하자와 연결된다. 더군다나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평론의 상대자가 죽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가 그녀와 그녀의 작품에 지나치게 깊이를 강요했다고 평하고 있다. 그는 그의 첫 평론 이후 그녀가 어떤 고뇌 속에 살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배설하고 있을 뿐이다. '하고 싶은 말을 별 뜻 없이'.

 

그녀의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 평론가의 말을 주워 섬긴 그들도 넓은 의미에서 그녀의 죽음을 방조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마도 그들은 평론을 보고 다시 수군거릴 것이다. "그 화가 말이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작품에 몰입했대. 그래서 죽은 거야. 쯧쯧."


평론가와 주변 인물들은 그렇다고 치고 도대체 그녀는 뭐란 말인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강제한 그들을 우린 우리가 속한 직장이나 학교 등과 같은 작은 사회와 그보다 큰 범주의 사회에서 자주 목격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바꾸고, 그런 사실이 들통나도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뭐 다 그런 거지' 하며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그들이야말로 사신(死神)이 잡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깊이 없는 사람들이 깊이 운운하는 가치 전도의 사회에 이 작품이 경종을 울려주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