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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뽀얀 먼지 날리는 문체, 예리한 칼로 벼린 구성, 목젖을 겨눈 스토리. 그의 소설적 특성은 그런 것들이다. 바싹 마른 목구멍을 달래려 몇 번은 기침을 해야 할 정도로 메마른 문체는 그래도 어느 순간 곰삭은 맛이 물씬 풍겨날 테고, 그러면 주체할 수 없는 그 향취로 그만 책을 덮어 먹먹해진 가슴을 쓸어 내릴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비웃듯 같은 길을 같은 간격으로 내닫는다.
그의 표현대로 건조함은 건조함을 불러올 뿐 다른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는 그 건조함은 메마른 여름날 퀴퀴한 장마라도 오면 좋겠다는 여느 여염집 아낙의 소원마저 간단없이 저버린다. 장마가 닥치고 얼마안가 요놈의 지긋지긋한 장마 빨리 가버려라고 툇마루에 침을 냅다 뱉을 심사인 아낙의 속을 빤히 보고 있잖은가. 그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지면 위에 빗줄기 한 방울 쏟아 놓지 않았다.
스르릉, 칼집을 빠져 나온 칼날이 어느 곳을 겨냥해야 할지 익히 아는 그는 정확한 손놀림으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향하는 지점을 향해 내지른다. 일격. 그것은 처음부터 예정된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런데 누가 봐도 들판 위에 활짝 드러난 광경임에도 보이는 것 외엔 보이지 않는다. 이미 바싹 마른 날, 지극히 건조한 공기와 그것에 비례해서 확 트인 시야를 앞에 놓고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이것은 봄날 지긋지긋하게 보아왔던 그 아지랑이(heat shimmer)다. 사물의 형상을 어제와 달리 만들어 내는 도발을 독자는 그의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뻔한 소재와 뻔한 구조임에도 전혀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지랑이 속에 숨어 넘실거리는 소설. 그래서 그의 소설은 간단하지 않다.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한참을 보아도 알 수 없는 심연. 하지만 그 곳엔 물기 하나 없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그의 말과 함께 듣고 보아야 한다. 『칼의 노래』가 출간된 후 6년만에 그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또 다른 소설, 『남한산성』 때문이었다.
『남한산성』은 '거리두기 '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화자는 주전파와 주사파,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그는 성내 인간군상들을 응시하고 그들의 행태를 묘파하는 도상에서도 감정이입을 배제했다. 종국적으로 닥쳐올 왕의 선택에 대해서도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개의치 않았다. 화자는 '경계 밖'에 있었다. 그리고 그 역할에 충실했다. 광경은 이야기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에 섞일 수 없는 화자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남한산성』은 그런 의미에서 앞선 『칼의 노래』와 동일 궤적을 그리고 있다.
『칼의 노래』는 저자의 첫 번째 소설이자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며, 이후 작에 표표히 흐르는 김훈표 역사소설이다. 화자는 이순신 자신. 기골이 장대한 이순신을 기대했다면, 그는 없다. 카리스마와 위엄, 호령으로 대표되는 이순신은 대의가 권력 뒤로 숨어 눈치를 보는 현실에 진저리를 치며 주어진 세계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전통적인 이순신은 현대적 이순신으로 대체된다. 주변 세계의 잘못을 목도하고도 저항하지 않는(또는 저항할 수 없는) 인간, 비판하되 수용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고 강변하는 회색인, 변하나 변하지 않을 세상과 유리되느니 몰입은 아니어도 발을 걸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경계인을 이순신은 대표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에게 영웅은 무의미하다. 강점이입을 배제하기로 작정한 저자에게 이순신이 영웅이든 졸부든 무슨 상관이 있었으랴. 한 인간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담담히 기술하려는 저자는 궁극적으로 자신 또한 현실에 섞일 수 없는 경계인임을 표상한다. 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들은 하나 같이 시대를 건너와 그와 교유한다. 이미 그들은 제각기 '김훈'이므로 그가 어느 누구를 특정해 그를 두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거리두기는 그래서 저자의 자발적 선택이면서 아울러 강요된 선택이 된다.
자신을 내어 주면서 자신을 얻는 인간상은 그의 작품에서 연속적으로 보이는 특성 중 하나다. 육체는 소멸하되 정신은 고양되는 절정감을 획득하려는 집요한 과정은 우리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정신을 버리고 기꺼이 물질을 향해 내달리는 사회를 건강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썩은 부산물이 쌓이고 그것을 치우는 데 수많은 자원과 노동이 소비된다. 제대로 투입되어야 할 자원과 노동의 빈곤은 위험을 노출하고 그것이 사회 기간망을 완전히 잠식해 들어가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천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 사고가 연이어 터지는 가운데서도 그 문제의 근본원인에 침묵하는 우리의 현실은 참혹하다 못해 절망적이다. 임시 미봉책으로는 근원적인 치유에 이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중 인물 이순신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일축한 조정은 전란 중에 이순신을 백의종군케 함으로써 이미 백성의 안위와 안전을 지킬 의지가 없음을 드러냈다. 자신의 안위마저 보증할 수 없게 되자 이순신을 복직시키지만 이순신은 더이상 과거의 이순신일 수 없었다. 결국 권력에 의해 법살될 것을 예견한 이순신은 '죽을 자리'를 향해 나아간다. 명랑해전이 그 자리가 아님을 안 그는 우리가 잘 아는 그 해전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한다.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제 어떻게 적군이 몰려올지 모르는 불안정한 전쟁터에서 극히 태연스런 문장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이 이미 자신이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알았기 때문은 아닌지 하고. 난중에 고요히 침잠하듯 일기를 쓸 수 있었던 배경엔 그렇듯 그를 둘러싼 상황과 그런 상황에 대한 분명한 입장 정리가 있었음을 추측하기란 사실 어렵지 않다. 감정이 배제된 건조한 시선과 절제된 상황 인식이 몰고 올 후폭풍을 당시 조선은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300년 후 조선은 주권을 빼앗긴다. 개인이 자유의지를 발휘할 전제조건을 말살한 국가와 사회의 멸망을 이순신이 자신의 죽음에 투사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음을 보여주었다면 억지일까.
그리고 다시 이순신이 저자와 동일시되고 있다는 인상은 저자가 각종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가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인간상을 꿈꾸는 데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를 향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의 문제를 지나치게 외면하는 것은 아니냐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기도 한다. 때론 그를 단박에 보수주의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를 무슨, 무슨 주의자로 규정하기 위해선 그가 지향하는 세계가 주의 주장에 맞닿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가 그린 주인공의 고뇌는 대부분 격정적이지 않고, 인물들은 평면적이다. 화자는 기술할 뿐 개입하지 않는다. 무수히 오가는 말은 주장없이 산발적으로 파열한다. 원심력이 지배하는 공간은 이명이 일정도로 정리되지 않는다. 작가가 의도한 바 세상은 자기 선택에 충실하게 살아갈 뿐이라는 다분히 피동적인 세계관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건조한 세상,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작가가 희망하는 세상이다. 주의 주장이 난무하고 거대담론이 풍미하던 세상을 헤쳐 나온 사람이 거처할 세상을 그가 그렇게 보았으리라. 하지만 그 세상 또한 임시 거처임을 모르지 않을 작가의 다음 세상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