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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그이의 글은 따뜻하다. 몇 달 전 그이가 티브이 나와 둥그런 얼굴에 유음 많은 목소리로 시 한 편 읊는 걸 보고 참 다감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 있다.
그럼에도 난 그이의 책과 가까워지지 않았다. 목적의식적으로 살다보니 심적 여유가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알게 모르게 그의 글을 여기(餘技)로 여기지 않았나 싶다.
역시 오늘도 그 잔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신경림의 시집을 여러 번 들었다 놨다 하고서야 그이의 시집을 택했다. 그리고 이렇게 가슴이 참 따뜻하다.
키 작은 골목 안 쪽으로 왁자지껄 아이들 소리가 달려들고, 비지찌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코끝에선 여태 가시지 않은 고 냄새가 한사코 마중 나온다.
시란 그런 것인가. 알싸한 추억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싯구 안으로 걸어 들어가도 좋은 참 따스한 봄날 늦지 않은 저녁. 그이의 시 하나 소개하고 총총히 잠에 든다.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 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가장으로서의 자랑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고 애정이나
연민 따위 더더구나 아니고 다만 반갑고 고독하고 왠지
시원시원한 어떤 결단 같아서 좋았던, 그 말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나가
좋을 것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 안에 기름 한입 고이던 밤
-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안도현
아버지가 끊어온 돼지고기 두어 근에 두둑하게 배 채운 난, 입맛을 다셨다. 언제 다시 이 날이 올는지 손꼽느라 스르륵 잠이 드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