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 - 짧은 제국의 황혼, 이문열의 史記 이야기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유방과 항우의 접전은 환타지였다. 요즘에야 헤리포터 시리즈가 최고의 환타지 소설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70년대만 해도 영웅호걸의 이야기가 단연 화제를 집중했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괴도 루팡'이나 '셜록 홈즈' 같은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이 심심치 않게 입에 오르내리기는 했다. 그렇다고 도둑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당시만 해도 직업이 많지 않던 때라 장래 탐정이 될 꿈은 꾸지 않았다. 영웅호걸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었지만 왠지 그들에겐 조금 다른 구석이 있었다. '람보'나 '터미네이터' 등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느낌을 생각해 보면 쉽겠는데, 영화 밖으로 나오자마자 괜스레 어깨에 힘을 들어가는 그런 것. 그 시절, 항우는 눈을 단박에 사로잡는 묘한 힘이 있었다.

 

위인전의 빳빳한 종이 위에서 모래 먼지를 자욱히 일으키며 힘차게 달리는 그의 창검에 적병은 추풍낙엽처럼 하늘 높이 날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나타난 그의 장엄한 죽음은 한동안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영웅은 유방이 가져갔다.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기개세와 수백 명을 대항할만한 놀라운 창검술, 휘하 장수들을 일순 사로잡는 카리스마 등 항우에 비하면 당시 내가 보기엔, 유방은 보잘 것 없었다. 포용력이 그가 가진 전부라면....... 항우의 천하를 유방이 빼앗은 것이라고 단정했다. 당시 항우는 변함없이 나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다시 30년을 지나 항우와 유방의 쟁패를 엮은 책을 만나고 보니,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감개무량했다.

 

이 책, 『초한지 1권』은 최고의 이야기꾼을 손꼽히는 이문열의 작품이다. 편향된 정치 발언이 자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면서 위상이 떨어지는 했지만 우리 문단에서 그의 존재감은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따뜻한 기온 탓에 계절에 앞서 핀 봄꽃이 삭풍에 시들어간 예처럼 청년기에 이미 소설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은 그가 빠르게 쇠락의 길에 접어든 것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장거리 달리기에 견줄만한 그의 인생은 하지만 그가 이미 100미터 달리기를 택함으로써 패착을 놓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다시 그가 문단으로 돌아와 장거리 달리기 선상에 선다면 이후 어떤 성취를 이룰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좋은 기록으로 완주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듯 이야기는 적정선을 유지하며 페이스 조절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앞서 나가도 좋을 순간임에도 좀체 서두르는 법이 없다. 독자가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도를 넘어 열광하지 않도록 인용과 거리두기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장차 화려하게 꽃필 명민한 화술을 더욱 벼리고 있는 1권의 압권은 화려하지 않지만 대단원의 막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갈 '영웅의 등장'에 있다.

 

그들의 등장은 그들의 이름값 만큼이나 묵직하다. 자신을 낮추며 때를 기다리는 그들의 행태가, 이곳저곳에서 독자들이 단편적으로 읽은 이야기와 맞물려 지루하게 이어지지만 그것들이 영웅들이 세를 규합해 가는 과정의 산물임을 안다면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다. 어떤 면에선 1권은 전편에 도도하게 흐를 인물 군상들의 활기찬 기개와 용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장이라는 시각으로 읽는 것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1권은 오히려 빠르게 읽기보다 호흡을 죽이며 읽어야 제 맛이다. 그래야 비로소 거침없이 도래할 영웅의 시대를 무한 몰입과 감상을 거쳐 속도감 있게 읽어내려 갈 수 있다.

 

유방과 항우의 등장에서 비롯한 그들의 유사점과 차이점, 한신의 외유내강에 대한 현대적 해석 등등 작품 외적인 시각적 접근을 열어놓은 것도 1권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터, 정권 교체기의 정치적 격량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이 주요 정치인들의 면면을 대입해 보며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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