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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없다
버지니아 펠로스 지음, 정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셰익스피어는 연극배우 출신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장으로 알려진 희곡을 쓰기에 걸맞은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이 책을 쓴 목적은 셰익스피어 희곡의 원저자가 베이컨임을 밝히려는 데 있지 않다. 여왕의 아들이지만 사생아처럼 길러져야 했던 한 인간의 고뇌와 눈물을 그리고자 함에 있다.」
저자의 변을 요약하면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역사적 사실과 작가적 상상력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공교하게 엮인 이 책은 양부모의 손에 맡겨져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이 자라던 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맞닥뜨린 채 가눌 길 없는 감정의 편린을 대책 없이 쏟아내며 소화되지 않는 혼란을 힘겹게 게워내는 것으로 독자와의 첫 대면을 시작한다. 초겨울 옷깃을 두텁게 여민 찬바람이 좁은 콘크리트 벽 사이로 세차게 불어닥치듯이 날 것 그대로 어미 뱃속에 잉태된 불행의 씨는 10개월의 고단한 삶이 끝이 아님을 웅변적으로 예고하고 있었다.
이미 수십 장의 페이지를 넘기고도 여전히 그의 생은 양부모의 손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무엇이 그를 앞으로 예비될 평범과 비범을 간단없이 가르는 비정한 생의 좌절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어느 날 문득 마주하게 된 현실이 더없이 고단하더라는 뒷얘기만 무성할 뿐 희미하게 비껴 들어오는 한 가닥 희망의 빛은 길을 잃고 너울거리기만 한다.
당대 최고 권력자인 엘리자베스 여왕은 처녀 여왕이라는 호칭을 허울처럼 쓰고 있었다. 묘비명에 조차 '처녀의 몸으로 살다가 죽은 여왕이 한 시대를 통치했다'라고 쓰이길 바랐을 정도로 처녀라는 이미지에 깊이 경도된 여왕은 제2권력자라 할만한 레스터 경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베이컨을 공공연히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양부모에게 출생의 비밀을 함구하도록 엄명을 내린 여왕은 그러나 그 자신이 그 사실을 베이컨 앞에서 격정적으로 토해냄으로써 파국의 시작을 알린다.
'셰익스피어는 없다'는 도전적인 제목과 뒷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간단한 소개글을 통해 책 내용을 어림짐작한 독자라면 굳이 지금 사실을 들춰내서 무슨 이득을 얻으려는 것인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보기에 따라서 설익은 논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컨이 작품 속에 숨겨 놓은 다양한 암호들이 베이컨이 생존했을 당시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고 확증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작품의 흐름상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문장을 골라내서 그 문장을 저자가 학습을 통해 습득한 당시 상황과 연결시켜 의미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전체적으로 저자의 사적 추론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저자 외에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연구자들이 암호 해독에 매달렸다는 증거가 제시되고, 그 결과물이 저자의 추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물로 제시되고 있지만 그 각각 또한 암호를 해독하는 방식에 관한 개인적인 취향 또는 오랜 탐구정신에 기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수준에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명명백백한 사실로 인정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저자와 일군의 연구자들의 주장만 가지고는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등의 희곡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는 학계의 정설을 허물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년 전 활발히 평론 활동을 벌이던 한 명민한 대학원생이 그의 저작을 통해 국문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김윤식의 작품(「한국 근대소설사 연구」의 2장과 4장인 '문학적 풍경의 발견'과 '고백체 소설의 기원')이 사실은 일본의 문학비평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표절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가 지적한 다양한 표절 사례에 대해 당사자가 입장 표명을 분명히 해야 옳았다. 그런데 당사자는 단순히 실수라는 차원에서 언급하였을 뿐으로. 정작 그의 문하생이자 현직 교수들이 벌떼 같이 들고일어나 그 대학원생을 집단적으로 고립시키는 치졸한 전략을 구사했다. 진로는 막혔고 결국 그는 대학원을 마치기도 전에 중도 하차해야 했다.
우리는 그 사건을 진실이 권력 앞에 초라하게 굴복하는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처럼 학계에 굳어진 정설, 곧 그것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더라고 오랜 세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로 받아들인 허위의식을 허물기가 쉽지 않다. 명백한 사실조차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반응양태를 흔히 회피기제 또는 방어기제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80년대를 거쳐온 사람이라면 이 부분에 대해 실제적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중·고교 교육 과정에서 배운 우리의 현실과 역사가 실제와 다르다는 사실을 선배나 당시 지하에서 유통되던 책을 통해 알게 되었던 때의 혼란은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제 이전에, 사실을 받아들일 경우 지금까지 배워온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될지 모른다는 허탈감과 그런 쓸모 없는 지식 위에 선 나의 존재감을 어떻게 보상받으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는 불안감의 반영이었다.
일정기간 홍역을 치르고야 비로소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였던 경험처럼 사회적으로 공고히 뿌리내린 동의-과학이란 것도 결국 다수 의사의 합치라는 점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흔들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무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고립감을 참지 못하는 개체화된 인간 사회가 천형처럼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현실적 장벽이 그만큼 공고하다는 점을 우선 알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으니까 장벽 앞에 주저앉아 있으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가 획득한 대다수의 진리는 힘겨운 투쟁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장벽 너머에 있는 진실을 찾아 고투한 선각자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우린 진실의 거울 앞에 한 발짝도 다가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작업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야 어떻게 됐든 저자가 당시 시대상황과 베이컨의 태생적 한계, 그리고 그가 짊어져야 했던 고난의 세월을 학자적 관점에서 치밀하게 응시하고 조합하고 재구성한 금번 시도가 우리를 보다 진실에 근접하게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사실과 조우해야 하는 당장의 이물감은 사실 진실에 다가서려는 인류의 지난한 투쟁의 과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사실 관계를 확인하려는 욕심에 눈에 불을 켜기 전에 베이컨이 살았던 시대와 그의 고뇌에 조건 없이 감정이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