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스트
김순덕 지음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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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마에 겐이치가 '국경없는 세계'를 예견한지 30년이 채 되지 않아 세계는 자본, 노동, 상품, 정보, 서비스 등이 자유롭게 거래되는 단일 시장으로 빠르게 통합되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 블록 내부의 유통은 가히 과거의 단일 국가 내 지역간 물자 이동의 경우와 비견될 만큼 아주 자유롭습니다. 물론 경제 블록들 간 경쟁이 엄존하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리적 거리와 역사적 동질감 등이 적절히 배합된 경제 블록이니 만큼 어느 정도의 장벽은 예상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과거 단일 국가의 보호무역주의처럼 폐쇄적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경제 블록은 자국 경제만으로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충족할 수 없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곧 경제 블럭은 그런 불안요소와 교역에 따른 차익의 기대심리를 지닌 다국이 ''헤쳐모여'를 하는 과정의 산물입니다. 자연 블록 내 연대감이 상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블록이 안정화됨에 따라 경제 파이가 확연히 커지게 되면 장기적으로 블록은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현재 세계엔 5개의 주요 경제 블록이 있습니다. 유럽연합(EU, 1993년 출범),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1994년 출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1967년 출범), 남아프리카관세동맹(SACU, 1969년 출범), 남미공동시장(MERCOSUR, 1991년 출범) 등입니다.

 

블록 간 또는 일국과 블록 간 교역은 관세를 위시한 진입장벽이 여전히 만만치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계속 과거와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글로벌리제이션이 이미 대세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블록 내 국가이든 그 밖의 국이든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세계적 트랜드 앞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세계는 이미 일국 경제 또는 블록 경제를 훨씬 뛰어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세계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뒤쳐지지 않을 수 없는 구조가 글로벌리제이션의 현주소입니다.

 

이 책은 그런 글로벌리제이션을 근접 관찰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상을 분석하고 특성을 찾아내는 관찰력과 현상 간 견련성을 조합하고 구분하는 구성력 등이 돋보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저자가 굳이 일찍 터트린 샴페인으로 보다 잘 기억되는 세계화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세계화의 역동성과 변화가능성을 표현하는 차원에서 원어 그대로 글로벌리제이션을 차용한 의미에 우선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년 전 한 광고 카피("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에서 보인 세계화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시각, 곧 세계적 흐름을 우리 입맛에 맞게 바꿔가려는 주관적인 입장을 편협한 것으로 규정하고 세계적 흐름에 승차하는 현실 적응적 관점에서 세계화의 의미를 조망하려는 저자의 의지가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원어 차용에 담겨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9. 11과 12. 11을 양 축으로 하여 현 세계의 글로벌리제이션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9. 11은 오사마 빈 라덴이 주도했다고 알려진 테러리스트들의 미 본토 공격을 지칭하고 12. 11은 중국의 WTO 가입을 표창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둘은 저자가 앞으로 진술할 정치상황과 경제상황을 드러내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것은 곧 세계를 보는 저자의 시각을 번영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두 사건을 글로벌리제이션의 해석 원리로 삼은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저자에게 현 세계의 정치 환경은 구두선에 그친 불안한 평화의 시대 위에 자란 온실 속 화초와 같다는 시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더욱이 불안한 평화의 내부에 잠복해 있는 특정 국가와 개인에 대한 폭력적 대항 의식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불안 의식이 잠재해 있기도 합니다. 아울러 핵 보유국들이 핵사용은 곧 공멸이라는 공감 하에 조성된 핵에 대한 자기 통제적 환경이 테러리스트들로 인해 무참히 무너져 내릴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9. 11은 그런 우려의 구체적인 사례인 것입니다. 만약 핵이 그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에게 그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9. 11이 현재의 세계와 이후 세계를 조망하는 프레임이 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중국의 WTO 가입은 질이 보장된 상품이 전 세계 시장에 싼 가격에 공급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입 전까지 중국 상품은 반덤핑 관세가 물리는 불량 거래 또는 지하 유통 상품처럼 취급받고 있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값싼 제품을 상시 공급받게 된 미국은 저금리 정책을 고수할 수 있었으며, 9. 11로 맞은 경제 위기를 보기 좋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9. 11과 12. 11은 미국에서 보면 위기와 기회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던 셈입니다.
 
9. 11과 12. 11을 통해 세계의 흐름을 진단하고 있는 저자의 시각은 얼마간 미국의 입장에 편승한 편향적 시각이자 미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대외 의존적 관점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든 원치 않든 이 책은 그런 한계를 고스란히 노정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비판한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의 맹점(가장 심각한 형태의 국제 분쟁을 문명 간 충돌에서 찾은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문명 충돌 외의 다종다양한 갈등 요인들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가 의제한 기독교 서구문명 대 이슬람 및 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충돌은 그 문명권에 속하지 않은 민족 또는 종족의 존재를 무시한 대표적인 이분법적인 사고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꽂히고 있는 것을 모르는, 저자의 경력으로 봐서 모른 채 하고 있다고 의심할 수도 있는 듯한 인상이 곳곳에 내비쳐 있기도 합니다.
 
그런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왜 그 두 사건이 글로벌리제이션의 양 축으로 규정되고 그것을 해석하는 유일무이한 기준인지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정 또는 전제를 기정사실화해 놓고 다음 진술을 이어가는 논거가 견고할 수 없습니다. 근거를 제시해야 할 필요성이 높은 부분에서 강박적으로 내 진술이 옳다라는 식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서술 방식은 아무리 선의로 봐 준다고 해도 무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이 이 책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글로벌한 세계의 경제, 노동, 복지, 교육 정책의 조건 또는 수단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글로벌리스트의 자격 조건과도 통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유연성(Flexibility), 적응력(Adaptability), 경쟁력(Competitiveness) 3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첫 알파벳자를 따서 '팍'(FAC)으로 달리 표현하고 있는 저자는 유연성을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통해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유럽식 사회 모델을 대가가 큰 달콤한 샴페인으로 간단없이 규정하고 영국과 아일랜드의 앵글로색슨 모델의 입엔 쓰지만 탁월한 실용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최근 후자의 예를 취한 독일과 프랑스의 선택을 보란 듯이 내세우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두 번째 적응력은 세계적 환경이 계획과 준비를 무색케 할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계획과 준비가 어렵다면 변화된 세계에 발맞추는 탁월한 적응력이 중요해질 것입니다. 동유럽으로 공장을 이전하려는 독일의 폴크스바겐사에 맞서(?) 임금인상 없이 주 근무시간을 28.8시간에서 33시간으로 늘리는 데 노사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일자리를 잃지 않게 그들의 선택과 우리의 현대차 노조의 '명분 없는 정치 파업'을 병치시킴으로써 설득력을 확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경쟁력입니다. 유연성과 적응력이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면 경쟁력은 최대한 잘 먹고 살자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경쟁력에 관한 한 달리 수식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경쟁력은 이미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용어가 되었습니다.

 
1장과 2장을 통해 9. 11과 12. 11의 주역인 미국과 중국의 응전과 전진을 찬양한 저자가 3장 전체를 할애해 글로벌한 세계의 생존 조건을 나열한 이유가 4장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4장에서 저자는 한미 FTA를 하늘이 준 기회로 믿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자의 '팍'(FAC)이 한미 FTA에 기댄 유효한 전략이자 한미 FTA 체결 이후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을 제고할 탁월한 전술이라고 주장하는 듯 합니다. 더군다나 그의 한미 FTA 예찬은 1장과 2장에서 많은 국가가 2007년 중반까지 활황을 경험하던 때에 오히려 저성장에 안주한 정책적 오류를 비판했던 것을 감안하면 격세지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아무튼 저자에게 한미 FTA 꽃놀이패와 같습니다. 저자는 한미 FTA를 중국의 WTO 가입에 견줘 그 가치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WTO 가입을 통해 세계 경제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과 같이 우리 또한 한미 FTA가 결과할 경제적 이익을 크게 향수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한미 FTA의 문제점에 대해 철저히 눈감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부분 저자의 글로벌리제이션이 결국 미국화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우산 아래 들어가면 옳고 그 밖으로 나서면 잘못리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기저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정책은 어느 것이든 장점과 단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점은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단점은 지속적으로 개선하고자 애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장단점이 명확하게 노출되어야 합니다. 단점이 사라진 장점만의 나열은 저자의 주장을 장밋빛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장밋빛에 취한 후의 반응이 과거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던 때의 그것과 같을 수도 있다는 경계심이 저자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IMF 관리체제에 편입되기 전 각종 매체와 전문가들이 쏟아놓았던 장미빛 미래 청사진을 다시 보는 듯해 씁쓸한 기분입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면밀한 분석과 비판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은 '경쟁의 원리로 본 세계 경제' 정도로 읽으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취향에 따라 확대와 축소를 반복하는 진술과 입맛에 맞는 짜깁기식 현상 수집 등의 문제점이 있음에도 이 책이 두루 읽힌다면 그것은 일국의 경제가 독야청청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의 재확인과 현실 세계의 경제 흐름을 빠르게 일별하는 단순성에 빚지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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