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 새사연 신서 3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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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살기가 힘들어."
얼마 전 택시를 탔더니 운전기사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비교하자면 예전이 지금보다 더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다고 덧붙였다. 예전에는 굶주리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함께'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단다. 사장이든 노동자든, 신발공장에 다니든 가발공장에 다니든 지금 함께 허리띠 졸라매고 뛰면 집도 마련하고 동생 대학도 보내고, 그러다보면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꿈이 있었단다. 너나 구분 없이 한 곳을 바라보고 노를 저어가던 그 시절. 아저씨가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아마도 모두가 함께 했던 '공동체 의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점차 계층이 분화되고 이해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언젠부턴가 모르게 우리 사회에서 '연대'라는 개념이 희미해졌다. 농업종사자들과 도시 근로자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고 같은 도시 근로자라도 대기업 근로자와 중소기업 근로자의 이해관계가 달라졌다. 대기업 CEO와 영세 자영업자의 입장은 천지차이다. 이렇게 각자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바람이 불어 닥치면서 상황은 더욱 냉혹해졌다. 피도 눈물도 없는 구조조정으로 인해 가장은 하루아침에 백수 신세로 전락했고 시장의 건실함을 위해 부실 기업들이 가차 없이 정리됐다. FTA로 농업종사자들은 논밭을 갈아엎었고 대학생들은 바늘구멍보다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해 낭만도, 시대정신도 모두 잃었다.

아비규환. 보다 큰 수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인간을 내칠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성 덕분에 사람들은 모두 자리자리 지키기에만 급급해졌다. 타인과 다른 계층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쏟을 여유를 잃어버렸다.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상황. 책은 그래서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대안으로 '연대'를 제안한다. 노동조합은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에서부터 영세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를 모두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대학교 학생회도 명문대, 지방대생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 이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책은 한 걸음 나아가 노동조합이 미래의 근로자가 될 대학생들과 연대해 거대한 시류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결국 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 이것이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면 당신의 문제가 언젠가는 나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위기의식. 책은 이런 공동체 의식이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라고 말한다.

이 책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여기까지 정리하자 생각은 저절로 '과연 나는 어떠한가.'라는 데 집중됐다. 타인의 문제에, 그리고 결국의 나의 문제가 될 우리 사회의 현안에 대해 나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가. 그래, 약자인 노동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하루 종일 눈칫밥 먹으며 종종거리는 일상에서부터 구조조정과 명예퇴직 등. 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열변을 토해가며 기업이 인간을 부속품 따위로 치부하는 현 사태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을 제기한다. 바로 내가 처한 현실이므로. 하지만 홈에버, KTX 등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물론 기업을 향한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투쟁을 지지한다. 그리고 이들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팽개친 기업의 몰지각함에 치를 떤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쌀 개방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다수 국민의 생활 안정을 위해 정부가 저가 곡물정책을 펼친 것하며, 우르과이라운드부터 FTA 등 심심하면 농산물 개방을 통해 다른 산업을 살리려는 정부의 무책임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제는 농민들을 지원하고 보호할 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여기까지. 난 비정규직도 아니고 농민도 아니므로 내 관심의 정도는 여기까지다.

심지어 내 자신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넘어갈 때가 있다. 대학교 시절에는 등록금 인상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얼마 전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도 적극적으로 무언가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왜냐면 굳이 나 아니어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대신 난 어떻게 행동했을까. 난 내 문제든 타인의 문제든 모두 남에게 맡기고 나는 혼자 낑낑대며 영어공부를 하고 이력서를 내고, 회사를 오가며 스터디를 했다. 남들이 어떻게든지 세상을 바꾸려고 한 목소리를 내는 새,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뒤처지면 가차 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신자유주의의 칼바람을 피하는 방법은 나 스스로 보다 '쓸모있는 부속품'(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고작 부속품이 되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인과 함께하기 보다는 그들을 짓밟아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경쟁하는 법만 배우고 연대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변명이 될까? 배우지 못했다는 것보다는 나 스스로 타인에 대해, 사회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먹고 살기 힘들었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닌 듯하다. 우리는 60~70년대 보다 절대적으로 풍요로운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조금 넉넉하게 산다는 사람들도 사회에 무관심한 것을 보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도 비겁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결국은 우리의, 그리고 나의 행동양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합리적인 이유도 없다. 나는 그저 무심한 사람일 뿐이다.

작가 공지영은 민주화 항쟁시 다른 사람들처럼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자책하고 괴로워했다. 그런 그의 고민들은 ‘인간에 대한 예의’, ‘별들의 들판’ 등 많은 작품을 통해 표출됐다. 나도 지금 그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당시의 고민들을 어떻게 해결한 것일까. 신자유주의로 인해 불거진 많은 문제들 앞에서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일까. 문득 내가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숨을 쉬고 먹고 마시는 것 외에 과연 인간으로서 깨어있는가. ‘인류는 서로를 위해 태어났다.’는데 나는 그런 면에서 보면 죽은 나무토막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입으로만 떠들고 정작 나는 내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해 혼자 살아남겠다고 발악한 것은 아닌지...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얼굴이 저절로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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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드레스 2009-06-15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옳소이다~~짝짝짝!!!
혼돈의 시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진실된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현실과 이상차이에서 오는 가치관의 혼란...말로만 민주화된 시대를 산다고 하지만..내면은 그렇지않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고 있는 오늘...슬프다^^: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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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흔한 이야기들을 말한다. 엄마의 꿈. 고달픔. 자식에 대한 사랑. 헌신. 엄마의 아픔과 눈물. 엄마의 엄마. 엄마의 사랑 등... 그리고 모두들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난 이기적이어서일까? 물론 우리 엄마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 세상이 모두 나를 외면해도 끝까지 내 편이 되 줄 그 분. 그 분의 존재를 느끼며 벅찬 눈물을 꾸역꾸역 참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내 머릿속을 뒤덮은 생각은, '내가 엄마가 된다면...'이라는 주제였다.

'나의 엄마, 그리고 모두의 엄마처럼 나도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 아니 사실은 '그렇게 해야만 되는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라는 걱정과 두려움이었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솔직하겠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나도 엄마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우리 엄마처럼?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지고 머릿속은 풍랑을 맞은 것처럼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차분히, 그렇다면 과연 엄마처럼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부터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의 인생을 단 몇 줄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지만 책을 바탕으로 대충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해 봤다.

<엄마처럼 산다는 것이란>

1) 아파도 참고
2)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고
3) 자식들은 사무적으로 대하고
4) 아무도 그녀의 인생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런 존재.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저 처음부터 엄마였던 존재.

정리해 놓고 보니 1), 2), 3)은 다 4)에 포함되는 듯하다.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도 않고, 돌봐주지도 않는... 하지만 늘 희생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퍼줘야 하는 사람.

나도 그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망설임 없이 단호한 No! 하긴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도 처음에는 나처럼 주저 없이 '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엄마는 어떻게 '엄마'가 됐을까.

모성애?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아이에게 좋은 것만을 주고 싶은 마음. 강아지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비교 자체가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강아지를 키우면 강아지에게도 맛있는 것을 주고 싶고 아프면 걱정이 되고 하는데 하물며 자식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조금 부족해도 자식에게 더 해주고 싶은 마음. 그런 모성애가 어머니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겠지... 아무리 모성애를 발휘한다고 해도 엄청난 희생과 헌신을 다 감내할 수는 없지 않을까. 자식들이 '엄마가 뭘 알아'라고 소리치고 방으로 턱 들어가면 그녀도 화나고 섭섭했을 것이다. 열이 펄펄 끓어 도저히 아침에 일어날 수 없었던 날도 있었을 것이고 갖고 싶은 화장품이며 옷을 사지 못해 애처럼 속상한 날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좋다고 따라다니며 뭐든 다 해줄 것 같던 남편이 꽃 한 송이,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을 때면 왠지 모르게 서글퍼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었을 것이다. 섭섭하고 힘들고 속상한 감정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엄마는 그렇게 지금의 엄마가 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모래알 같던 서글픔이, 다음엔 자갈 같은 아픔이. 그런 한숨이 기어이 바위가 되면서, 그러면서 그 무게들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져 가지 않았을까? 새색시와 첫 아이의 엄마와 자식을 출가시킨 어머니가 각기 감당하는 무게가 모두 다르듯이. 고달픔에도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지나보다.

잘 모르겠다. 나 역시 이 땅의 모든 딸들처럼 엄마의 인생을 잘 모르기에, 엄마가 어떻게 완성돼 가는지 짐작도 못하겠다. 결국은 엄마에게 소홀했던 이 땅의 모든 무심한 딸들처럼 흔한 감정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 엄마의 꿈. 고달픔. 자식에 대한 사랑. 헌신. 엄마의 아픔과 눈물. 엄마의 엄마. 엄마의 사랑 등... 결국 지금의 우리 엄마는 내가 만들었다는 생각에 뜨거운 눈물이 핑...하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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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드레스 2009-06-15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갑자기 보고 싶은 엄마!!
어제까지 늦은밤에 전화해서 엄마랑 나누었던 간결한 대화...
미쳐 보고 싶어 전화해도 전화선이 연결해 주는 탁한 음때문인지 엄마에대한 고마움을 표현도 못하고 모질게 끊어버린다...
멀리 있어 더 보고 싶은 엄마...헌신이라는 모성애로 자식들때문에 살아온 엄마!
나도 과연 인내심있는 모성애를 발휘할수 있을까?? 솔직히 지금은 자신없다!!
 
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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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게 물으신다면. 천재의 삶과 범인(凡人)의 삶 중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난 어떤 삶을 택해야 할까.

천재의 삶. 고독하고 외롭고 힘겨운 자리. 동시대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천재 개인에게는 저주일 수도 있다. 차라리 동시대인들이 이들의 재능을 알아봐 시기와 질투를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범인들에게는 그들의 능력을 시기할 능력마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천재들의 앞엔 하는 일들마다 칭송과 인정은커녕, 비난과 시련이 가득하다. 김홍도와 신윤복 역시, 기본도 모르는 부자격자로 치부되기도 하고 화원 전체의 물을 흐리는 망나니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들을 파면해야 한다는 상소도 심심치 않게 이어진다. 어디 그 뿐인가. 운이 좋아 또 다른 천재를 만난다 하더라도 그 미묘하고 애틋하고 서글픈 감정들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하늘 아래 천재는 오직 한 명이어야만 하기에 누군가는 경쟁에서 사그라져야 하는 일. 동지이면서도 라이벌인 서글픈 관계. 자신의 세계를 인정해주는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고맙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조금 뛰어났으면 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욕심들. 그래서 천재는 범인들 속에서도 천재들 속에서도 그렇게나 고독하다.

그렇다면 범인의 삶? 글쎄. 특별한 것이 없다. 수천 명, 수백만 명 중 하나. 누가 그들의 이름 석 자라도 기억해 줄라나? 매일 아침 눈 뜨고 먹고 일하고 자고. 별 일 없는 인생인 듯하나, 하루하루는 고달팠던 그네들의 삶. 10년, 20년, 100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수많은, 아니 대부분의 인생들. 범인들도 무언가를 이루려고 했을 것이다. 그들도 분명 무엇인가를 꿈꾸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능력이 따르지 않으니 그것이 안타까운 일. 윤복의 형 영복이 그러했다.

누대로 궁정화원을 지낸 화인 가계의 유일한 '오점'. 온 세상이 떠받드는 재능, 왕의 용안을 두고도 붓을 떨지 않을 자신감, 정묘하고 세밀하여 터럭 하나도 놓치지 않는 감각을 그는 얻지 못하였다

고 작가는 그리도 세세하게 묘사했다. 선 하나를 그려도, 점 하나를 찍어도 천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을, 어찌하란 말인지...

어떤 삶이 행운이 깃든 삶인고... 천재와 범재. 둘 다 힘든 삶이지만 모두 가치있다...는 식의 뻔한 말은 집어치우련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참을 수 없이 상투적이니까. 나라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아마 천재의 삶이 아닐까? 그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환멸로부터, 판에 박힌 일상의 무미건조함으로부터 훌쩍 떠날 수 있으니까. 저항할 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으니까. 재주가 있으니 당대에는 비록 인정을 못 받고 자신의 신념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더라도 비루하게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을 게다. 간간히 나타나는 그들의 예민함과 과격함, 날카로움과 자유분방함 등도 천재이기 때문에 묻혀 진다. 마치 흰 눈이 모든 추한 것을 덮듯이.

그러나 나 같은 범인들은... 나 같은 범인들도 뻐꾸기 시계추처럼 매일 똑같은 하루하루가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할 때가 있다. 후진적인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때가 있다. 범인들도 분명히 모든 것을 박차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능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에... 모든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것들을 뛰어넘을 정도의 재능이 없음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에 그저 씁쓸한 쓴내를 삼키고 말 뿐이다. 그나마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마저 소멸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용기가 없어서라고? 비겁해서라고? 단순히 그렇게 비난하지는 말자. 솔직히 말해, 용기는 용기고, 엄연히 재능은 재능이니까.

작가는 '김홍도에 비해 속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후문만을 남기고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졌다는 신윤복'이라며 그의 삶을 애도했다. 하지만 정말 흔적도 없이 지워진 쇠털 같은 인생들에 비하면 많은 그림들과 한 줄의 후문을 남긴 윤복은 얼마나 운 좋은 삶이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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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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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아버지는 품격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항상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다. 지로의 수학여행비가 비정상적으로 비싸자 지로 아버지는 또 화를 낸다. 여행사와 학교 간에 어떤 비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지로 담임 선생님에게 매일 편지를 보내고 교장실을 다짜고짜 쳐들어가 결국 경찰에 연행되고 만다. 품위와 우아함이라곤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지로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다. 아버지가 좀 더 품위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 남들처럼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과 집을 조용 조용히 오가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화가 나도 얼굴 붉히지 않고 차분히 생각하는 아버지였으면 하는 것이다. 설사 화나는 일이 있어도 모르는 척 넘어갈 때도 있어야 한다는 게 지로의 생각이다. 지로가 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품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발상을 바꿔보면 지로 아버지가 한 차원 높은 품격을 가진 사람이다. 불의에 항거하며 이에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 품위있는 사람이 아닐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 무섭고, 자신에게 미칠 손해가 두려워 차라리 눈을 감아버린다. 여수 출입국 사무소 화재로 불법 체류 외국인 근로자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도 우리는 그저 그런가 했다. 그들이 이 땅에서 받은 온갖 학대와 차별에 분노하지 않았다. 비정규직자들의 서러운 목소리에도 우리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고 이라크파병을 요구하는 미국에게 한마디 큰소리도 내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우아해도 너무 우아하다.

지로 아버지의 정의감과 실천력이 과연 우리들에게있는가. 자신들의 손익에만 혈안이 돼 먹고사는 데만 급급한 요즘 세상이다. 떠들썩한 울분과 저항이야말로 요즘 세사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갖춰야 할 진정한 품격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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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드레스 2009-06-15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망치로 머리를 한대 뻥 맞은 느낌...
스스로에게 부끄럽다.
한없이 남들과 비교하고 더 좋은 가정의 아버지와 나의 어버지를 머릿속으로 비교했던 나
남들은 간사하고 교묘해서 밉다고 큰소리만 치던 나는 혼자서 잘난척 쿨한척 거짓되게 행동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나를 있게해준 분을... 깊이 반성해야겠다.
누가 뭐라해도 나의 아버지이니까...
 
타나토노트 1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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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에 관한 소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돈에 대한 욕망, 미지의 세계를 알고자 하는 욕망 등 인간의 탐욕은 다양하고 무한하다. 타나토노트는 특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이 강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자발적으로, 코마상태에 빠져들어 죽음 이후의 세상을 탐험한다. 그 실험으로 수백 수천 수만의 사람이 죽어가지만 죽음도 인간의 욕망을 제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베르나르가 정작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삶에 대한 욕망인 듯하다. 소설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멋진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죽음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진다. 현생의 선행에 따라 점수가 매겨지고 개인은그 점수고 다음 삶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자살로 몰아 넣었다. 다음 세상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다시 시작하기 싶어서.

살다보면 정말 이럴 때가 있다. 인생을 다시 쓰고 싶다는 욕구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내가 계획했던 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을 때 우리는 이런 욕망에 사로잡힌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 함께 하고 싶었던 배우자, 내가 상상했던 가정. 이 모든 것들과 정반대인 일들이 현실로 실현될 때 우리는 진흙덩이 뭉개듯 고거를 뭉개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어한다. 어쩌면 자살자들은 삶에 대한 애착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멋진 삶, 꿈꾸던 삶에 대한 집착이 너무도 강한 완벽주의자들 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완벽주의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의 인생에는 완벽이란 없다. 인생에는 항상 실수와 실패, 좌절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이 멋진 이유는? 바로 단 한 번이기 때문이 아닐까? 깨끗하게 'delete'키를 누르고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키를 누르는 순간 모든 것은 그대로 사라지게 된다.

나도 지금보다 훨씬 멋진 인생을 살고 싶다. 그리고 또 잘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힘든 것들을 '꾸역꾸역' 이겨내며 생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가혹한 진실을. 나약하고 여린 내가, 내 삶의 무게들을 훌륭히 감당할 수 있을지 사실은 자신이 없다. 그래도 나라는 인간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은 내가 이런 사실들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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