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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신이 내게 물으신다면. 천재의 삶과 범인(凡人)의 삶 중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난 어떤 삶을 택해야 할까.
천재의 삶. 고독하고 외롭고 힘겨운 자리. 동시대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천재 개인에게는 저주일 수도 있다. 차라리 동시대인들이 이들의 재능을 알아봐 시기와 질투를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범인들에게는 그들의 능력을 시기할 능력마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천재들의 앞엔 하는 일들마다 칭송과 인정은커녕, 비난과 시련이 가득하다. 김홍도와 신윤복 역시, 기본도 모르는 부자격자로 치부되기도 하고 화원 전체의 물을 흐리는 망나니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들을 파면해야 한다는 상소도 심심치 않게 이어진다. 어디 그 뿐인가. 운이 좋아 또 다른 천재를 만난다 하더라도 그 미묘하고 애틋하고 서글픈 감정들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하늘 아래 천재는 오직 한 명이어야만 하기에 누군가는 경쟁에서 사그라져야 하는 일. 동지이면서도 라이벌인 서글픈 관계. 자신의 세계를 인정해주는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고맙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조금 뛰어났으면 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욕심들. 그래서 천재는 범인들 속에서도 천재들 속에서도 그렇게나 고독하다.
그렇다면 범인의 삶? 글쎄. 특별한 것이 없다. 수천 명, 수백만 명 중 하나. 누가 그들의 이름 석 자라도 기억해 줄라나? 매일 아침 눈 뜨고 먹고 일하고 자고. 별 일 없는 인생인 듯하나, 하루하루는 고달팠던 그네들의 삶. 10년, 20년, 100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수많은, 아니 대부분의 인생들. 범인들도 무언가를 이루려고 했을 것이다. 그들도 분명 무엇인가를 꿈꾸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능력이 따르지 않으니 그것이 안타까운 일. 윤복의 형 영복이 그러했다.
누대로 궁정화원을 지낸 화인 가계의 유일한 '오점'. 온 세상이 떠받드는 재능, 왕의 용안을 두고도 붓을 떨지 않을 자신감, 정묘하고 세밀하여 터럭 하나도 놓치지 않는 감각을 그는 얻지 못하였다
고 작가는 그리도 세세하게 묘사했다. 선 하나를 그려도, 점 하나를 찍어도 천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을, 어찌하란 말인지...
어떤 삶이 행운이 깃든 삶인고... 천재와 범재. 둘 다 힘든 삶이지만 모두 가치있다...는 식의 뻔한 말은 집어치우련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참을 수 없이 상투적이니까. 나라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아마 천재의 삶이 아닐까? 그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환멸로부터, 판에 박힌 일상의 무미건조함으로부터 훌쩍 떠날 수 있으니까. 저항할 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으니까. 재주가 있으니 당대에는 비록 인정을 못 받고 자신의 신념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더라도 비루하게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을 게다. 간간히 나타나는 그들의 예민함과 과격함, 날카로움과 자유분방함 등도 천재이기 때문에 묻혀 진다. 마치 흰 눈이 모든 추한 것을 덮듯이.
그러나 나 같은 범인들은... 나 같은 범인들도 뻐꾸기 시계추처럼 매일 똑같은 하루하루가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할 때가 있다. 후진적인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때가 있다. 범인들도 분명히 모든 것을 박차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능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에... 모든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것들을 뛰어넘을 정도의 재능이 없음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에 그저 씁쓸한 쓴내를 삼키고 말 뿐이다. 그나마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마저 소멸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용기가 없어서라고? 비겁해서라고? 단순히 그렇게 비난하지는 말자. 솔직히 말해, 용기는 용기고, 엄연히 재능은 재능이니까.
작가는 '김홍도에 비해 속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후문만을 남기고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졌다는 신윤복'이라며 그의 삶을 애도했다. 하지만 정말 흔적도 없이 지워진 쇠털 같은 인생들에 비하면 많은 그림들과 한 줄의 후문을 남긴 윤복은 얼마나 운 좋은 삶이었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