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기억의 저편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연미선 옮김 / 자작나무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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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서평은 2012. 09. 25. 그나마 9월에 쓴 서평은 달랑 2편. 그리고 이제 11월 말이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책도 많이 못 읽고 글도 많이 못 썼다.

 

 하루 24시간 중 온전히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은 몇 시간이나 되는지. 눈 뜨고 일어나서 회사와서 집에 가고 집에서부터 자기 전까지 고작 3~4시간이 내 자유시간인데 그나마 그 시간들도 이런 일 저런 일들로 쪼개져 공중으로 분해된다. 그나마 일주일에 몇 번 1~2시간 요가를 하는 시간이랑, 주말에 잠시 숨을 돌리는 정도인 것 같은데. 그 동안 주말에도 뭐 그리 바빴는지 차분히 앉아서 이리 저리 흩날리는 생각들을 하나 하나 가라앉히며 숨 고르기를 할 새가 없었나 보다. 나는 어떤 일들 때문에 그리도 부산스러웠을까.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의무감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는 것이 조금은 슬프기도 한 것 같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서 오늘은 뭘 하며 보낼지를 고민하는 행복한 시간들을 사랑하는데 요즘은 통 그러질 못했나 보다.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이런 건 실패하면 안 되고 저런 건 참아야 되고 이런 말은 하면 안 되고 저런 말은 어렵지만 해야 되고 어떤 일에서는 정색을 해야 되고 어떤 문제 앞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듯 호탕하게 넘겨야 하고.

 

 그러다 보니 하루 24시간 중 정말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고민해 보게 된다.

 

  괜히, 고민했다.

 어떤 고민들은, 때론, 슬픈 얼굴일 때가 있다.

 

 내 기억들은 웬만하면 행복한 표정이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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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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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 하게 책상머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것도 며칠을,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바로 컴퓨터로 서평 쓰기에 돌입한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술술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청준의 '그 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는 왜 그렇게 지루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왜 이 두 책을 비교하려고 했냐면 두 사람 모두 이데올로기로 아파했던 개인의 삶을 묘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연관성 없을 것 같은 이 두 사람을 엮은 이유는 바로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이청준의 '그 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는, 아 벌써부터 멀미가 나려고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오랜 시간 차 냄새 가득한 고속버스를 타고 울렁거리는 꼬부랑 꼬부랑 길을 어지럽게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속이 메스껍고 그만 차에서 내리고 싶고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싶은, 차를 탈 때마다 느끼는, 익숙하지만 결코 되풀이 해 경험하고 싶지 않은 지긋지긋함이었다, 이청준의 소설은.

 

 반면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흥미진진했고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아, 맞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글을 읽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멀미가 났었지. 한 줄 한 줄 생각의 거리가 너무 넘쳐나 글을 읽어 나가는 것이 너무 힘겨워서. 거의 모든 소설에 꼭 들어가고야 마는, 한 여성을 여러 남성이 농락하는 성폭행의 장면이 역시나 이 소설에 들어가 있어서. 그러나 이 두 가지 멀미의 원인은 이데올리기로 인한 염증이 아니었기에 이 글에서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왜일까. 똑같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으로 인한 갈등, 이로 인한 무고한 개인의 아픔들을 엮어낸 글인데 한 쪽은 나에게 재미를 준 반면, 다른 한 쪽은 나에게 울렁거림을 주었던 이유가.

 

 익숙함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청준의 이야기는 빨갱이며, 공산당이며, 이산가족이며, 남북 상흔 등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주 반복해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제는 서론만 듣기 시작해도 피곤해 지는 지긋지긋한 넋두리들. 물론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여전히 우리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지만, 내가 염증을 느끼는 부분은 이를 이용해 니 편이니 내 편이니를 갈라 패거리 싸움을 하는 것이다. 특히나 정치권에서 민심을 얻으려고 우리의 특수 상황을 이용해 먹는 꼬락서니들을 보면 이제 화가 나다 못해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싶다.

 

 내가 좋아하는 김선우 시인의 소설 캔들 플라워를 읽었을 때도 이와 같은 느낌이었다. 촛불 시위를 순수하게 바라보지 않고 이념을 나누고 너와 나를 나누고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행태들이 아, 또 시작인가, 하는 한숨이 터져나오게 했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자유롭게 토론을 하는 세상은 언제쯤이나 당도할지. 자기들만 맞다고 떠들어대는 세상에 사는 것이 피곤하고, 피곤하다.

 

p.s. 어우, 서평을 막 쓰려고만 해도 멀미가 난다. 그래서 제대로 마무리도 못한 서평. 진절머리나도록 싫은가 보다, 너와 나를 가르는 것이,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편을 나누려고 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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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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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 살이 넘으면 결국 심각한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나보다.

 

 나와 어머니를 버리고도 그간 한 번 소식이 없던 아버지는 미국에서 잔디를 깎다가 죽었단다. 아버지의 미국 아들이 이런 소식을 전해왔을 때도 그녀는 슬퍼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자신을 스스로 동정하지 않는 법을 어미로부터 배웠던 그녀는 한 곳에 붙어있지 못하고 어디론가를 향해 항상 달려야만 했던 그의 아비에게 눈부시지 말라고 썬글라스를 끼워주는 것으로 슬픔을 대신한다. 배때지를 쑤셔버리겠다며 식칼을 드미는 어미와 방바닥에 누워 다리를 흔들며 시덥지 않은 농담을 나누며 깔깔대던 그녀는 가볍지만은 않은 현실을 통통거리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화창한 햇살 아래 짧은 치마와 스니커즈를 신은 20대 소녀들의 발랄한 웃음 같았던 그녀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꼭 스니커즈를 신은 소녀들의 웃음이어야 한다. 높다란 힐이 아닌. 그 둘의 웃음은 느낌상 큰 차이가 있다.)


 모든 일에 지나치게 심각한 나는 그녀가 주는 쾌활한 웃음 소리를 들으며 그래,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이제 그녀는 곧 철거될 아파트에서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겨 모두가 떠난 썰렁한 아파트에서 오줌 지린내가 진동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한다. 다단계의 늪에 빠져 돼지 죽 같은 밥을 먹으며 휴대폰을 압수 당하고 온갖 인맥을 동원해 물건을 팔아야 하는 수용소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학원 제자를 밀어넣는 대신 수용소에서 빠져나오는 것에 성공, 나중에 제자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의 청사과 같던 젊음은 갈변되기 시작한 거다.

 

 빛바랜 머릿칼, 피곤한 회색빛 얼굴. 화창한 햇살에도 아무런 감동 없는 멍한 눈빛. 슬프고 답답하고 힘겨운 나날들이 그녀의 앞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서른 살의 표정이란 이래야 한다. 스무살에는 보지 않았던 것을 보아야 하고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어야 하고 마냥 청초해 눈부시던 빛을 조금은 잃어야만 한다. 그래야 성숙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고 조금 더 묵직해졌다는 칭찬을 받는다. 그렇게 사람은 익어가는 거란다.

 

 조금 아플 수도 있지만 이까짓 거, 라는 식으로 툭, 털어버리던 그녀의 대범한 기개가 마음에 들었었다. 자신의 현실에 지나치게 빠져들어 우울해 하기 보다는, 소설 읽듯, 다른 사람의 인생인 듯, 약간 거리두기를 한 듯한 그녀의 태도를 본받아야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던 날카로운 눈빛, 그러면서도 내내 유지하던 싱그러운 유머와 웃음이 참 매력적이었는데.

 

 서른이 되어도 짧은 치마에 스니커즈를 신고 대학 캠퍼스를 신나게 활보하기를. 서글픈 회색빛 현실 속에서도 초롱초롱한 눈망울 만큼은 항상 간직하기를.

 

 그랬으면 좋겠다, 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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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주의 사생활 - 조선 왕실의 은밀한 이야기
최향미 지음 / 북성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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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혜공주는 숙부에 의해 동생과 남편을 잃고 귀양을 가게 되고 노비가 되고 승려가 돼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단다. 성종 딸 휘숙옹주는 남편 임승재가 그렇게도 따르던 연산군에게 농락을 당했고 정신옹주는 후처의 딸이라고 혼담에서 퇴짜를 맞았단다. 중종 딸 효종옹주는 난봉꾼 조의정에게 시집을 가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속을 끓이고 효종 딸 의순공주는 화냥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던가.

 

 결국은 책 한 권 분량으로 요약되는 그녀들의 삶. 책 한 권도 안 되고 각각 한 챕터로 요약되는 간략함.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란 로또 1등에 연속해서 10번 당첨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겠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던 왕의 딸, 공주였대도 결국 후세에는 단 몇 줄로 기억될 뿐이다. 그녀들의 인생은 지독히도 파란만장했는데. 궁에 감금 당하기도 하고, 피비린내 진동하는 소용돌이에서 몇 번씩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는데. 그나마 책으로 기억되는 공주는 몇 안 되고 이름 석 자 깡그리 잊혀진 공주들이 얼마나 많은지.

 

 의미있는 일을 해야겠다. 두고두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기억으로 옮겨갈 수 있게.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내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게. 힘든 일, 어려운 일, 슬픈 일들을 그래도 꿋꿋이 이기면서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하찮은 먼지처럼 조그만 자국도 남기지 못하고 후, 날아가 버리면 조금은 허탈하니까.

 

 이리 생각하다가도,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 주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굴곡진 인생에서 흘려야 할 눈물이 많겠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야말로 의미있는 삶이 아닐까, 하는 귀여운 전환.

 

 어떻게 사는 것이 매 순간 순간 행복하게 사는 걸까. 마냥 단순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도 행복은 아닐테고, 그렇다고 매번 진지한 얼굴로 분위기를 흐려놓는 것도 삶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 것 같다. 모든 일에 딴지를 거는 것도 피곤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며 슬렁슬렁 넘어가는 것도 비겁하다.

 

 저녁 무렵,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때쯤, 달콤한 풀냄새를 맡으며 하는 산책. 어두운 실루엣들의 느긋한 움직임, 방정맞게 뛰노는 강아지. 부드럽게 스치는 바람. 약간 긴장되게 만드는 컴컴한 산 능성이. 깜박이며 켜지는 주황빛 전등과 삘링 삘링 다양한 풀벌레 소리들. 내가 사랑하는 소리, 나를 행복하게 하는 모습들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보는 화창한 날씨. 당장 산책하러 갈 테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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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더하기 25 -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
조은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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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 이라는 단어는 왠지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개인의 의지나 능력이나 노력 정도에 따라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시련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가난을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본보기나 롤 모델로 추앙을 받기도 한다. 그런 시련이 있어야 인생이 좀 더 풍성해 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열심히만 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마구마구 끓어 오른다. 시퍼런 청춘이 펄떡 펄떡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이미지.

 

 빈민촌, 이라는 말은 왠지 더럽고 파리가 꼬이고 꼬질꼬질하고 흙먼지로 잔뜩 뒤덮여 있는 느낌이다. 이건 극복해 내고 말고가 아닌, 극복의 대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냄새가 많이 날 것 같아 다가가고 싶지 않은 생각만 들 뿐이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한 이미지랄까.

 

 가난과 빈민촌이 실상 크게 다르지 않은데 두 단어가 주는 어감은 어찌 이리 다른지. 때때로 우리들은 가혹한 현실을 너무나 쉽게 한 단어로 미화시키기도 한다.

 

 게다가 철거라든지, 재개발 같은 단어는 더욱더 흉물스러운 실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폐허가 된 건물 외벽에 시뻘겋게 칠해진 X표들. 군데 군데 허물어진 담장하며, 쌓여져 있는 쓰레기 더미들. 게다가 철거 반대 시위라든지 용산 참사 등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힘겨워진다.  우리의 삶은 왜 이리 처절해야 하는지.

 

 죽음까지도 불사하지 않는, 생존권을 위한 투쟁 앞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지. 개인의 잘못인가, 사회의 잘못인가 잘잘못을 따지기는 너무 진부하다. 이야기가 아닌 생생한 피비린내 나는 현실 앞에서, 숨 쉬고 살아내야 하는 삶의 무게 속에서, 벗어나고자 벗어나고자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망칠 수 없는 단단한 굴레 밑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책장을 넘기면서 가끔은 가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한 번 겪어보지도 못하고 지나치다 그 흔적조차 경험해 보지 못한 교수와 연구원들의 무지함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들의 방에서는 가난의 냄새가 난다는 둥, 왜 그들은 맨날 싸우기만 하고 술이나 마시고 다니면서 가난을 이겨낼 생각은 하지 못하냐는 둥, 왜 그들의 범죄를 짓고 다니냐는 둥, 이렇게 좁은 방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했다는 식의 이야기들. 그들의 삶이 마치 대단한 발견이나 엄청난 깨달음이나 되는 것처럼 눈을 똥그랗게 뜨고 주고 받는 대화들. 곱게만 자란 교수와 연구원들이 생살 냄새가 진동하는 그들의 삶을 학문의 대상으로 관찰하는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다소 당황스럽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 또한, 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교수와 연구원을 비판할 자격이 나에게도 없지 않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현실적인 새로운 대책, 이렇게 하면 모두 잘 살 수 있다는 사기꾼 같은 명쾌한 해결책, 내가 돈을 많이 벌어 이들을 구제하겠다는 비현실적인 영웅주의 말고, 실체도 없고 실행도 없는 가식적인 사명감도 말고, 누가누가 잘했네 못했네 라는 쓸데없는 지적질들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특히나 누군가의 생 앞에서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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