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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서른 살이 넘으면 결국 심각한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나보다.
나와 어머니를 버리고도 그간 한 번 소식이 없던 아버지는 미국에서 잔디를 깎다가 죽었단다. 아버지의 미국 아들이 이런 소식을 전해왔을 때도 그녀는 슬퍼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자신을 스스로 동정하지 않는 법을 어미로부터 배웠던 그녀는 한 곳에 붙어있지 못하고 어디론가를 향해 항상 달려야만 했던 그의 아비에게 눈부시지 말라고 썬글라스를 끼워주는 것으로 슬픔을 대신한다. 배때지를 쑤셔버리겠다며 식칼을 드미는 어미와 방바닥에 누워 다리를 흔들며 시덥지 않은 농담을 나누며 깔깔대던 그녀는 가볍지만은 않은 현실을 통통거리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화창한 햇살 아래 짧은 치마와 스니커즈를 신은 20대 소녀들의 발랄한 웃음 같았던 그녀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꼭 스니커즈를 신은 소녀들의 웃음이어야 한다. 높다란 힐이 아닌. 그 둘의 웃음은 느낌상 큰 차이가 있다.)
모든 일에 지나치게 심각한 나는 그녀가 주는 쾌활한 웃음 소리를 들으며 그래,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이제 그녀는 곧 철거될 아파트에서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겨 모두가 떠난 썰렁한 아파트에서 오줌 지린내가 진동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한다. 다단계의 늪에 빠져 돼지 죽 같은 밥을 먹으며 휴대폰을 압수 당하고 온갖 인맥을 동원해 물건을 팔아야 하는 수용소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학원 제자를 밀어넣는 대신 수용소에서 빠져나오는 것에 성공, 나중에 제자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의 청사과 같던 젊음은 갈변되기 시작한 거다.
빛바랜 머릿칼, 피곤한 회색빛 얼굴. 화창한 햇살에도 아무런 감동 없는 멍한 눈빛. 슬프고 답답하고 힘겨운 나날들이 그녀의 앞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서른 살의 표정이란 이래야 한다. 스무살에는 보지 않았던 것을 보아야 하고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어야 하고 마냥 청초해 눈부시던 빛을 조금은 잃어야만 한다. 그래야 성숙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고 조금 더 묵직해졌다는 칭찬을 받는다. 그렇게 사람은 익어가는 거란다.
조금 아플 수도 있지만 이까짓 거, 라는 식으로 툭, 털어버리던 그녀의 대범한 기개가 마음에 들었었다. 자신의 현실에 지나치게 빠져들어 우울해 하기 보다는, 소설 읽듯, 다른 사람의 인생인 듯, 약간 거리두기를 한 듯한 그녀의 태도를 본받아야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던 날카로운 눈빛, 그러면서도 내내 유지하던 싱그러운 유머와 웃음이 참 매력적이었는데.
서른이 되어도 짧은 치마에 스니커즈를 신고 대학 캠퍼스를 신나게 활보하기를. 서글픈 회색빛 현실 속에서도 초롱초롱한 눈망울 만큼은 항상 간직하기를.
그랬으면 좋겠다, 그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