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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늘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정지한 듯한 구름만큼이나 느리고, 따뜻한 햇살아래 빈 시골집처럼 조용한. 주룩주룩 비내리는 회색빛 세상만큼이나 우울하고, 감기몸살에 고열까지 겹친 것 만큼이나 힘겨운...
신경숙 글의 특징이다.
더 깊게, 더 또렷이, 더 냉철하게. 그렇게까지나 철저하게 내면을 응시한다. 그저 지나쳐 흐르는 것들을, 그저 그렇게 흘러야 되는 것들을, 아니 일부러 그렇게 흐르도록 모른척 하는 모든 것들을 그녀는 잔인하게 파헤치고 또 파헤친다.
후루룩 한 번.
후루룩 두 번.
왜 그렇게 후루룩, 읽어버렸을까. 처음 읽었을 때는 그냥 그 땐 모든 활자를 읽기 싫어서 그랬겠지... 생각했다. 피곤했으니까. 그래서 몇 달 후에 다시 꼼꼼히 읽어보려고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또 후루룩이다. 내 성질이 급해서 그녀의 느린 발자국들을 견디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그렇게까지 물끄러미 바라볼 수 없었던 걸까. 한 자 한 자 밟아 내려가기가 아프고 에렸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 둘 떠올라서. 마주한 적 없었던 낯선 것들이 함부로 툭, 툭 터져 나와서. 아니 마주하기 싫었던 것들일 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미뤄놨던 것들일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기어이 내 앞으로 가져다 논다.
'내가 살아보려 했으나 마음 붙이지 못한 헤어짐들, 슬픔들, 아름다움들, 사라져버린 것들. 과학적인 접근으로는 닿지 못할 논리 밖의 세계들, 말해질 수 없는 것들, 그런 것들.'
'시간 앞에 무력하기만 한 사랑, 불가능한 것에 대한 매달림, 여기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
애써 외면했던 감정들, 잊으려 했던 사람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들, 받아들일 시간도 틈도 안주고 무작정 쏟아져 내린다. 감당하기 힘들어 헉헉거린다.
이런 저런 감정들에 치이고 받치고 두들겨 맞다가, 그래도 꾸역꾸역 버티다가는 어느새 울컥! 결국 막혔던 울음을 터뜨린다. 목에 메였던, 억지로 삼키고 삼키고 삼키고 있었던 응어리들이 하나 하나 올라와 설운 울음이 되고 엉엉 큰소리가 된다.
그녀의 글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지금보다 더 느렸으면, 더 예민했으면 나도 이런 글을 썼을 텐데...
지금보다 덜 느리고 덜 예민했으면 나도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들 때문에 이렇게 아프지 않을 텐데... 이 어중간함...
마음이 부산할 때, 심신이 무너져 내리는 듯 허약할 때, 그냥 다 내려놓고 무너져 버리고 싶을 때, 그럴 때 그녀의 책을 읽는다. 마치 지금의 이 우울과 슬픔이 내 탓이 아닌양. 마치 그녀의 글 때문인양 덤터기를 씌우고 싶을 때. 이를 핑계로 내 안에 남은 온갖 설운 것들을 토해내고 싶을 때. 그럴 때...
이 허약함을 어째야 하나. 더 세심해져야 하나, 더 단단해져야 하나 머뭇거리고 머뭇거린다. 어째야 하나... 우두커니 시간을 흘려보내다 부러운 듯 그녀의 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