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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 - 개정판 ㅣ 나남창작선 58
박경리 / 나남출판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수옥은 혼자였다. 그것도 전쟁 통에.
내가 수옥이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아니 살아남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살아남으려면,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일단은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체력과 호신술이 필요하겠다. 태권도를 배워야 하나? 푸훗. 지금 당장 전쟁이 난다면 변변한 호신술 하나 익히지 못한 난, 금세 사냥꾼들의 먹이가 되겠다.
더 억척스럽고 독해야 할 필요도 있겠지. 악다구니처럼 주변 사람들과 싸울 줄도 알아야 하고 걸신들린 사람처럼 아귀아귀 먹을 줄도 알아야겠지.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빵 하나에 눈이 뒤집혀 미친개처럼 달려들어야겠다. 지금은 이런 내 모습이 상상도 안 되지만, 아마 실제 전쟁이 터지면 '이렇게 해야해' 라는 '의지'가 아닌 자연스러운 '본능'에 의해 이런 모습으로 바뀌지 않을까, 하는 결코 재미있지만은 않은 상상도 해본다.
생각이 너무 많아도 안될 터. 외롭다느니, 힘들다느니, 고달프다느니 이런 배부른 생각 따위는 집어치우는 게 좋을 듯 하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그 하나만을 생각하고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통 비우듯이 깔끔히 비우는 것. 그것이 전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일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차면, 누가 나를 다치게 하기 전에 스스로 생기를 잃게 되니까. 또 약간은 바보처럼 구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자신을 귀찮게 여기는 남편과 시누이를 보며 '나는 정식으로 결혼한 마누란데 왜 저럴꼬...'하며 끝까지 따라가는 선애처럼,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다.
파멸하더라도 살아남을 만큼 모질어야 한다. 설령 전쟁 중에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더라도, 부모를 잃고 형제와 헤어지고 계략에 속아 몸을 버리는 등... 그렇더라도 주저앉지 않을 만큼 모질어야 한다. 강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결국 선애는 이런 모든 일을 겪고도 살아남는다. 학수를 만나서. 자신을 아껴주는 학수 때문에 다시 한 번 힘을 얻고, 자신을 되찾고, 반항할 용기를 얻는다. 결국은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과 함께 할 때 행복했던 막내둥이, 까불이 선애는 그들을 잃어 주저앉았다. 그러다 다시 학수를 만나 기운을 차린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고 잃고 만나고 하는 과정에서 울고 웃는 우리 인생사. 결국은 사람인가...
전쟁이 아니더라도 현재 우리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필요한가보다. 좀 더 강해지고, 단단해지고, 모질어지고, 단순해져야 하나?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숨쉬는 것만으로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평소 내 지론이다. 하지만 가끔은 얼빠진 바보처럼 그저 그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좀 더 악다구니가 돼서 악악거려도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운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힘을 얻고 또 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아야 하는 요지경 속. 그 안에서 한 번쯤은 그래도 되는 게 아닌가, 아니 그래야 되는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