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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 좋지... 발 닿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누비고, 눈 뜨고 싶을 때 깨어나, 먹고 싶은 것으로 혀끝을 적시고, 이야기하고 싶은 새로운 사람들과 풍성한 대화를 나누는...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끔찍한 일상을 탈출해, 바람처럼, 허공인양 가볍게 불어가며 신선한 자극과 활력을 온 피부로 느끼는, 자.유.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심연에 가라앉은 쇳덩이 같은 무거운 일상을 벗어버리고 훌쩍 떠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은, 바로 하루하루 현실을 살아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지루하고 지겨운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을 그래도 꾸역꾸역 견뎌내는 것이 어디 그리 녹록한 일인가? 참치 통조림 같은 지하철 속에서 짐짝처럼 구겨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그대로 어디론가 증발하고 싶은 욕구를 참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처자식 때문일 수도 있고, 가난한 부모 때문일 수도 있고, 주렁주렁 달린 동생들 때문일 수도 있다.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게 누비고 싶은 마음을 이 악다물고 참아내는 이들을, 과연 누가 성급하게, 너희들은 용기 없는 현실주의자라고 감히 비난할 수 있을까.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록새록 체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꿈이나 소망도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헛된 공상에 불과하고,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반짝반짝 빛나던 꿈도 쇠락하기 때문이다. 삼 시 세끼 쪼르르 한 달을 굶어가면서도, 수술비가 없어 하루하루 죽어가는 연인을 보면서도,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 그러나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즐거움으로 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사랑하는 자식을 자신의 무능함으로 인해 저 세상으로 보낸 후에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자신의 재능이 과연 본인에게 얼마나 큰 만족감을 가져다줄까.
자신은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기에 육체와 정신을 돈 몇 푼에 팔 수 없다며 나이 먹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손 벌리고 있는 꼬락서니 역시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자신의 가치관과 개성이 온전히 존중받기 원한다면서 정작 경제적으로는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이기적인 모순이란 말인가. 재주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항상 종이와 물감이 없어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며 동생 테오에게 돈을 구걸했던 반 고흐는 어쩌면 테오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이기적인 형이었을 지도 모른다.
규칙적인 생활과 비합리적인 억압, 숨막히는 갖가지 규정들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위대한 예술가들과 방랑자들. 이들은 물론 용기있는 사람들이고 세상의 비인간성에 반기를 든 혁명가요, 선구자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들은 인내심이 없는 조급한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특정한 직업이 없었던 프루스트는 그나마 들어간 법률사무소에서 고작 2주 밖에 견디지 못했고, 보봐리 부인을 탄생시킨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파리 법과대학 생활에서 낙제를 면하지 못했다. 이들은 천재적인 소설가요 예술가였지만 어쩌면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일은 조금도 참지 못하는 의지 박약자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영 틀린 것일까. 일정한 직업도 없이 병약하기만 했던 프루스트를 오랫동안 지켜봐야 했던 그의 노모는 얼마나 많은 밤을 한숨으로 지새워야 했을까.
안정감이 있어야 생산적일 일을 할 수 있으며 자신만의 꿈을 위해 가족에게 구걸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며 인내심 없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 어쩌면 그것은 세상의 틀 안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나의 모습을 합리화하려는 변명은 아닐까?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하면서도 실은 내 자신이 타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이리저리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이것이 현명한 판단이라며 남지도 않은 마지막 자존감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비판해 마지않던, 껍데기만 남은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체념해가던 전철을 나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이를 먹어갈 수록 어쩌면 나는 무서워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차곡차곡 무엇인가 안정감을 쌓아가고 있는 친구들 틈에서, 아무 것도 없이 마냥 자유롭기만 하는 것이 두려운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바랬던 자유는 성공 속의 자유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쳇바퀴를 탈출하지 못하고 그 곳에 발 한 쪽을 담그고 있으려는 건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비겁한 핑계를 대면서. 그래서 나는 책에 나온 이들처럼 지금 쥐고 있는 알량한 것들을 내려놓고 사뿐히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자존심과 이상은 겨우 이만큼에 주저앉을 만큼 허약했던 모양이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사실 꽤나 편안하고 안락한 일이다. 무엇이 됐든, 암튼 그래도 명함 하나라도 내놓을 수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다보면 퇴근시간이 되고, 주말이 되면 역시나 아무 생각 없이 시시덕거릴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월급이 들어오고, 그러다 보면 1년 2년이 흘러가 있다. 사람들로부터 쟤는 뭔가 하는 따가운 시선을 받을 일도 없고, 세상과 다른 길을 가느라 혼자 맘 고생하거나 내가 과연 옳은 길을 가고 있나 고민할 필요도 없다. 나 혼자 뒤처지는 것이 아닐까 조바심 낼 필요도 없고, 결국 내가 하는 일이 빛을 보지 못하면 내 인생은 뭘까 답답해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의 거대한흐름과 시선을 거스르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소득이 있다면, 나의 자존심이 참으로 허약한 것이었구나, 나에겐 강인한 혁명가적 기질이 있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한 점이다.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한 시간들. 이제 와 현실에 안주하지 말자 말자, 더 치열해지자, 예민해지자, 되뇌어 봐도 소용없는 일일 게다. 세상의 틀을 깨려고 했던 나의 소망은 인위적인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진정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번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것이 이끄는 대로 나의 인생은 그렇게 꾸며질 것이다. 앞으로 나의 발걸음이 어느 곳을 향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할 말 없는 인생이 되지는 말자는 것. 한동안 내 여행의 이정표는 이것이 될 듯하다.
p.s. 이들처럼 몇 년 동안 여행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다만 하루라도 잠시 탈출을 해야 할 듯하다. 새로운 공기가 마냥 늘어져 있는 내 정신을 긴장시키겠지. 다음 주 이 시간, 난 서울을 벗어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