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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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차, 퇴물, 값 떨어져, 어다 써먹냐, 좋은 시절 다갔다, 30이면 인생 끝이지, 남자 37살과 같다는 둥.빨리 시집 안 가면 평생 못간다, 고를 처지 아니니까 대충 맞추라는 둥 32살 여자는 녹 슬 대로 녹 슨 고물 취급이다. 난 그냥 난데...

여자는 점점 조급해지고, 두려워지고, 무서워지고, 급기야 돼먹지 않게 여자 나이 운운하는 세상에 대해 울컥 화가 치민다. 그러다가도 위축이 된다. 어차피 이런 말들을 지껄이는 남자들 중 한 명과 사랑을 해야 하니까. 그녀는 100세 수명을 자랑하는 이 세상에서 유독 30살 넘은 여성에게는 사형선고를 내리는 요지경 속에 살고 있으므로. 32살 노처녀의 심리 상태는 카오스, 그 자체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이제 나는 고물이 돼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예기치 못했던 나의 운명. 더 좋은 사람과 평생을 지내려고 했던 것뿐인데. 더 합리적이고 성숙하고 나이스하고 젠틀하면서도 배려심 있는 그런 사람을 찾기 원했던 것뿐인데... 이제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니. 누군가와 달콤한 사랑을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결혼을 하고 싶은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답답하고 모든 문제는 더 짙은 안개 속으로 빠져든다. 엉망진창이 된 머리는 더 이상 생각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이제 무작정, 대충 고르기 시작한다.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아니어도 '남자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하면서 두세 번 더 만난다. 이놈이 시원찮긴 하지만 여기서 헤어지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지 않을까 주판알을 튕겨본다. 마음에 딱 들지 않으니 막상 결혼하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쿨하게 헤어지지도 못하겠고, 그녀의 저울은 하루에도 수십 번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러니 그녀의 머릿속은 오죽이나 복잡할 것이며, 영혼은 또 얼마나 피곤할지. 그놈의 성질이 문제라고 그래서 한심한 코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온갖 애교와 아양으로 역겨운 웃음을 날린다. 현명한 행동일까, 거짓 가면일까. 그녀의 고민은 가면 갈수록 광활해진다.


게다가 '멋진 남자'의 기준도 20대 초반과는 확연히 다르다. 키가 172cm여도, 약간 대머리여도, 이런 것들은 이제 다 부질없어진다. 탄탄한 직업에 부모도 웬만큼 재산을 갖추고 성격도 싸이코가 아닌 한, 그러면 괜찮은 남자다. 참 간단하다.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걸까, 그의 조건을 사랑하는 걸까. 아님 적당한 조건을 가진 그를 사랑하는 걸까. 조건을 사랑하면 안 되는 걸까? 그의 매력에 경제적인 능력 등을 포함해서는 안 되는 걸까? 끊임없이 쏟아지는 의문들에 치여 이제 그녀는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다.


그래, 모르겠다! 그냥 이 정도면 됐으니 결혼하자, 마음 먹어도 쉽지 않다. 내 나이에 이 정도 조건은 다시 없는 기회라며 조급한 마음으로 끼워 맞춘 사랑이 사랑일까? 그렇다고 세상이 정한 기준으로 퇴물인 내가 누군가를 더 기다리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이렇게나 복잡한 심정의 그녀와 결혼한 그 남자는 과연 행복할까. 무엇인가에 떠밀리듯 결정한 결혼, 과연 사랑일까.


사랑이 아니라고, 너는 지금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거라고 그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열등하고 하자 있는 존재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빛과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홀로 태연하고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비정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혼자 있기 두렵고 쓸쓸해서, 고독하고 외로워서, 혼자 사느니 그래도 70점 정도의 사람을 만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그녀의 생각을 누가 코웃음 치며 비웃을 수 있을까.


다만 그저 씁쓸할 뿐이다. 32살 노처녀의 사랑은 그래서 항상 쫓기는 것만 같아서. 그리고 32살 노처녀의 서러운 처지를 겪지 않기 위해 28, 29살 여성이 조바심 내며 결혼을 하는 것도. 세상이 말한 결혼적령기의 여성(약 27~32 정도인가? 이 기준도 불분명 하지만...)들이 모두 무엇인가의 시선에 얽매이는 것도 안타깝고, 그녀들과 결혼한 남성들은 대체 어떤 사랑을 꿈꿨는지. 32살 노처녀의 사랑이 불가능하다면 진실한 사랑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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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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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좋지... 발 닿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누비고, 눈 뜨고 싶을 때 깨어나, 먹고 싶은 것으로 혀끝을 적시고, 이야기하고 싶은 새로운 사람들과 풍성한 대화를 나누는...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끔찍한 일상을 탈출해, 바람처럼, 허공인양 가볍게 불어가며 신선한 자극과 활력을 온 피부로 느끼는, 자.유.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심연에 가라앉은 쇳덩이 같은 무거운 일상을 벗어버리고 훌쩍 떠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은, 바로 하루하루 현실을 살아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지루하고 지겨운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을 그래도 꾸역꾸역 견뎌내는 것이 어디 그리 녹록한 일인가? 참치 통조림 같은 지하철 속에서 짐짝처럼 구겨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그대로 어디론가 증발하고 싶은 욕구를 참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처자식 때문일 수도 있고, 가난한 부모 때문일 수도 있고, 주렁주렁 달린 동생들 때문일 수도 있다.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게 누비고 싶은 마음을 이 악다물고 참아내는 이들을, 과연 누가 성급하게, 너희들은 용기 없는 현실주의자라고 감히 비난할 수 있을까.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록새록 체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꿈이나 소망도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헛된 공상에 불과하고,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반짝반짝 빛나던 꿈도 쇠락하기 때문이다. 삼 시 세끼 쪼르르 한 달을 굶어가면서도, 수술비가 없어 하루하루 죽어가는 연인을 보면서도,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 그러나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즐거움으로 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사랑하는 자식을 자신의 무능함으로 인해 저 세상으로 보낸 후에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자신의 재능이 과연 본인에게 얼마나 큰 만족감을 가져다줄까.


자신은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기에 육체와 정신을 돈 몇 푼에 팔 수 없다며 나이 먹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손 벌리고 있는 꼬락서니 역시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자신의 가치관과 개성이 온전히 존중받기 원한다면서 정작 경제적으로는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이기적인 모순이란 말인가. 재주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항상 종이와 물감이 없어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며 동생 테오에게 돈을 구걸했던 반 고흐는 어쩌면 테오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이기적인 형이었을 지도 모른다.


규칙적인 생활과 비합리적인 억압, 숨막히는 갖가지 규정들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위대한 예술가들과 방랑자들. 이들은 물론 용기있는 사람들이고 세상의 비인간성에 반기를 든 혁명가요, 선구자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들은 인내심이 없는 조급한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특정한 직업이 없었던 프루스트는 그나마 들어간 법률사무소에서 고작 2주 밖에 견디지 못했고, 보봐리 부인을 탄생시킨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파리 법과대학 생활에서 낙제를 면하지 못했다. 이들은 천재적인 소설가요 예술가였지만 어쩌면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일은 조금도 참지 못하는 의지 박약자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영 틀린 것일까. 일정한 직업도 없이 병약하기만 했던 프루스트를 오랫동안 지켜봐야 했던 그의 노모는 얼마나 많은 밤을 한숨으로 지새워야 했을까.


안정감이 있어야 생산적일 일을 할 수 있으며 자신만의 꿈을 위해 가족에게 구걸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며 인내심 없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 어쩌면 그것은 세상의 틀 안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나의 모습을 합리화하려는 변명은 아닐까?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하면서도 실은 내 자신이 타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이리저리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이것이 현명한 판단이라며 남지도 않은 마지막 자존감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비판해 마지않던, 껍데기만 남은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체념해가던 전철을 나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이를 먹어갈 수록 어쩌면 나는 무서워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차곡차곡 무엇인가 안정감을 쌓아가고 있는 친구들 틈에서, 아무 것도 없이 마냥 자유롭기만 하는 것이 두려운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바랬던 자유는 성공 속의 자유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쳇바퀴를 탈출하지 못하고 그 곳에 발 한 쪽을 담그고 있으려는 건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비겁한 핑계를 대면서. 그래서 나는 책에 나온 이들처럼 지금 쥐고 있는 알량한 것들을 내려놓고 사뿐히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자존심과 이상은 겨우 이만큼에 주저앉을 만큼 허약했던 모양이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사실 꽤나 편안하고 안락한 일이다. 무엇이 됐든, 암튼 그래도 명함 하나라도 내놓을 수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다보면 퇴근시간이 되고, 주말이 되면 역시나 아무 생각 없이 시시덕거릴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월급이 들어오고, 그러다 보면 1년 2년이 흘러가 있다. 사람들로부터 쟤는 뭔가 하는 따가운 시선을 받을 일도 없고, 세상과 다른 길을 가느라 혼자 맘 고생하거나 내가 과연 옳은 길을 가고 있나 고민할 필요도 없다. 나 혼자 뒤처지는 것이 아닐까 조바심 낼 필요도 없고, 결국 내가 하는 일이 빛을 보지 못하면 내 인생은 뭘까 답답해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의 거대한흐름과 시선을 거스르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소득이 있다면, 나의 자존심이 참으로 허약한 것이었구나, 나에겐 강인한 혁명가적 기질이 있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한 점이다.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한 시간들. 이제 와 현실에 안주하지 말자 말자, 더 치열해지자, 예민해지자, 되뇌어 봐도 소용없는 일일 게다. 세상의 틀을 깨려고 했던 나의 소망은 인위적인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진정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번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것이 이끄는 대로 나의 인생은 그렇게 꾸며질 것이다. 앞으로 나의 발걸음이 어느 곳을 향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할 말 없는 인생이 되지는 말자는 것. 한동안 내 여행의 이정표는 이것이 될 듯하다.


p.s. 이들처럼 몇 년 동안 여행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다만 하루라도 잠시 탈출을 해야 할 듯하다. 새로운 공기가 마냥 늘어져 있는 내 정신을 긴장시키겠지. 다음 주 이 시간, 난 서울을 벗어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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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2009-09-22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꿈을 이룰 수 이루려면, 현실부터 정복해야할 듯.
현실을 정복하는 방법은 상상력에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옥이 2009-09-23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을 정복하는 방법이 상상력에 있다는 말이 꽤 어려운걸.. 무슨 뜻이야? ㅋㅋ
 
자기만의 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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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말에 따르면 먼저 돈이 필요하다. 그녀는 연간 500파운드 정도의 고정적인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고 말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조건은 남녀를 불문하고 어떤 지적인, 예술적인, 그러나 비생산적인(돈을 버는 것을 생산이라고 생각한다면)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꼭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다. 그래야 한 주제에 관해 여유를 가지고 깊게 고민할 수 있고, 고민의 결과를 타인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며, 이런 고민의 시간들 속에서 굶어죽지 않을 수 있다. 지적 자유가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다는 그녀의 말이 꽤나 충격적이었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니 맞는 말이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 자유는 공허할 뿐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성마저 짓밟고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구구절절이 말로 설명할 필요 없겠다...


두 번째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방.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고요히 생각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은밀한 장소. 이것 역시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누군가가 픽션을 쓰려면 꼭 필요한 요소다. 특히 여성에게는 이 문제가 절실하다. 언제부터인지 추정할 수도 없이, 여성은 거실이나 부엌에서 타인의 뒤치다꺼리를 해야만 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이 역시 구구절절이 논할 필요 없겠다. 생각해보니 울프가 말하는 자기만의 방이란 꼭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 그런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져 그 누군가의 진정한 방을 만들 것이다. 우리가 18세기 여성의 소설이나 희곡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성들은 꾸준히, 독자적인 방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지금은 울프가 살았던 20세기 초반보다 사정이 훨씬 나아졌지만, 글쎄. 애엄마가 가질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란 과연 충분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타인의 신뢰, 기대감, 지지. 아니 기대나 지지가 아니더라도 핍박을 하지는 말아야겠다. 울프는 이렇게 말했다. "키츠와 프롤베르와 그 밖의 천재적인 남성들이 몹시 견디기 힘들어했던 세상의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무관심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이었습니다." 자신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핍박을 받고서도 온전히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냐고 울프는 우리에게 묻는다. 무관심도 인간에게는 크나큰 고통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옥일 것이다. 지옥은 타인이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관심을 넘어 적대감이라면. 그는 자신감을 잃고, 위축될 것이고, 두렵고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그 단계를 지나면 인성이 왜곡되고 비뚫어지기도 할 것이다. 아직도 우리들은 남자아이들에게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여자아이들에게는 순종적인 미를 강조하는 교육을 학교에서, 집에서, 암암리에, 무의식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갖는 믿음이 얼마나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가를 생각하면, 우리가 갈 길은 너무나 멀다.


갈 길이 멀든, 이미 온 길이 꽤 되든,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꾸준히, 묵묵히, 우리의 길을 가는 것일 게다. 울프는 그 미래에 대해서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여성은 새롭고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할 기회를 이전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데 노예처럼 남성을 모방하면서 여성은 이 기회를 낭비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우리는 더 가난해야 한다. 가난이란, 살아가기에 충분한 돈을 뜻한다. 어느 누구에 대해서나 독립적을 수 있고 몸과 마음을 온전히 발달시키는데 필요한 건강과 여유, 지식, 기타의 것들을 소량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돈. 그러나 이 이상은 안 된단다. 1페니라도 더 벌어서는 안 된다고 그녀는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순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순결이란 직업을 통해 살아갈 만큼 충분히 벌었을 때 돈을 위해서 두뇌를 파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뜻이란다. 즉,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그만두거나 오로지 연구와 실험을 위해 종사해야 한단다.


그녀의 이 정의를 들었을 때, 머리를 맞은 듯 띵~ 했다. 가난이란 살아가기 충분한 돈을 버는 거라니! 가난할 만큼 충분히 돈을 벌었을 때 그만 둬야 하다니! 와우~ 모두가 기를 쓰고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요즘 세상에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이렇게 신선하고 흥미진진한 거구나! 무엇인가를 뒤집으려는 고민으로 타인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아무튼 더욱 가난하고, 더욱 순결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마구 치솟아 오른다. 배지나 훈장, 학위 등을 신랄하게 조롱하면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충성심으로부터 탈피하면서. 문득 생각해보니 재미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만의 방에서 어찌하면 더 가난하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습들이. 푸훗,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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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 개정판
쇼펜하우어 지음, 김재혁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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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어찌나 황당한지 '이게 그 유명한 쇼펜하우어가 쓴 논문이란 말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쇼펜하우어, 라고 하면 왠지 어렵고 심오할 것 같았는데. 그런 나의 기대가 보기 좋게 무너졌다. 복잡한 이론들만 쏟아낼 것 같던 그의 논문은 너무나 유치했고 나의 배에서는 낄낄, 어이없는 웃음이 다 나왔다. 이런 논문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쓸 수 있겠다.

확대해석하라, 느닷없이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질문하라,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어라(상대방의 화를 돋우려면 상대방에게 노골적으로 악담을 하거나 트집을 잡으면 된다. - 이런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상대방이 자살을 옹호하면 우리는 지체없이 '그러면 왜 당신은 목을 매지 않습니까'라고 소리치면 그만이다, 상대가 억지를 쓴다고 큰소리로 외쳐라...


그의 논문을 읽고 있자니, 마치 수준 낮은 초등학생들의 싸움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한 방법들은 실제 토론에서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목소리 크게 우기는 데는 도가 없으니 말이다. 그 모순이 더욱 흥미롭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이 논문을 쓴 목적은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토론술을 제시해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를 쓰라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떼를 쓰는 사람들의 부정직한 방법들을, 진실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재빨리 알아차리고 물리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피카>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아무나 상대로 닥치는 대로 논쟁을 벌이지 말고, 자신이 아는 사람으로서 결코 불합리한 것을 내세우지 않고 만약 그럴 경우 스스로를 창피하게 여길 만큼 충분한 분별력을 지닌 사람들과만 논쟁을 하라. 그리고 권위적인 명령이 아니라 근거를 가지고 논쟁을 하고 우리가 내세우는 근거에 귀를 기울이고 또 거기에 동의할 수 있을 만큼 분별력을 지닌 사람과 논쟁을 하라. 그리고 끝으로 진리를 높이 평가하고 비록 논쟁의 적수의 입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정당한 근거라면 거기에 기꺼이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 또 진실이 상대방 측에 있으면 자기 의견의 부당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과 논쟁을 하라."


닥치는 대로 아무나와 논쟁을 벌이지 말라는 쇼펜하우어의 조언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한다."라는 우리나라 속담과 일맥상통한다. 미성숙한 사람을 일단 피하고 보라는 그의 조언은 옳은 것일까.


만일 내가 뻔뻔하게 목소리만 높이는 사람들과 토론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아직은 내가 그런 후안무치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는 수준이라면, 일단은 그를 상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괜히 그와 토론을 한답시고 마주앉아 있다 보면 금세 둘 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싸우고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도 확대해석하고, 이성이 아닌 권위에 호소하고, 의미없는 말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며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방법들을 유감없이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상대방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 미성숙한 사람과 토론을 하고 싶다면, 그의 잘못된 생각과 태도를 교정해 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질 때까지 자중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설익은 내가 섣부르게 상대방과 논쟁을 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간섭하게 되고, 잔소리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대방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비난하고 경멸하는 오만과 독선에 빠지게 된다. 이 얼마나 눈살 찌푸려지는 경거망동인가.


더 나아가 상대방의 어리석음과 미성숙한 행동들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함부로 논쟁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충분히 깊은 맛을 낼 때까지 혼자 속으로만 삼키고 삼키는 자의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도 무게가 있다. 상대방이 삿대질하며 화낸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지 않아도 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사람들에게 준 상처 때문에 혼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너그럽게 미소로 모든 것들을 지나칠 수 있을 때까지, 그 때까지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포용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우선은 많은 경험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의견을 접하고 내 주장과 반대되는 주장들과 싸워보면서 수백 가지에 이르는 상황과 저항에 부딪혀 보는 것. 싸워보기도 하고 수긍해보기도 하고 반대로 내 고집을 부려보기도 하는 과정들이 모여야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나의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의 깊이도 깊어질 것이다.  토론 혹은 말싸움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주었던 상처들에 대해 남몰래 반성도 해보고, 오늘 아무개에게 했던 인신공격을 잠들기 전 생각하며 눈물 나게 부끄러워도 해보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 뼘 더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나 닥치는 대로 상대하지 말라는 쇼펜하우어의 충고는 결국 일단은 모든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지는 걸까. 묵직한 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침묵하자는 앞의 말과 모순되기는 하지만, 은은한 울림을 낼 수 있을 때까지 젊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치열한 고민과 싸움일 것이다. 열심히 상대방 주장을 확대해석 하면서 끝까지 고집을 부려볼까나~

p.s. 쇼펜하우어.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경멸적인 시선과 세상의 거짓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 그의 오만함 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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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 부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2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민희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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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봐리즘'

허영심과 풍부한 상상력에 의해 자기 암시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을 실재하는 자신과 다르게 여기는 정신분석학적 용어. 현재로부터의 끊임없는 도피를 구하면서 항상 자기가 있어야 하는 곳과는 다른 곳에 있으려 하는 욕망. 과거의 추억이나 미래의 꿈에 대한 환상 속에 사로잡혀 실제 자신의 모습을 부인하는 망상.


자신을 사랑해주는 우직한 남편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채 바람둥이, 호색한 등의 거짓 애정을 좇다 끝내 파산, 음독자살에 이른,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그 보봐리 부인의 허영심과 헛된 욕망을 비판하기 위해, 그리고 보봐리 부인처럼 아직도 자신의 현재와 분수에 만족하지 못하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정신분석학적 전문용어.


그래, 엠마는 그런 여자였다. 쥐뿔 가진 것도 없으면서 상류층 부인이 되기를 원했고 그들의 화려한 파티를 그리워했다. 그녀 자신도 그들처럼 될 수 있으며 그럴 만한 자질이 있다고 믿었다. 불륜과 정사 속에 눈이 멀어버린 부정한 여자. 자신을 위해 이사도 하고 새로운 수술에도 도전하고 극진히 병간호도 했던 남편을 그저 따분하고 야망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 어리석은 사람. 그렇다. 그녀는 한 마디로 나쁜 여자였고, 인간의 미성숙함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유치한 여자였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과 전문가들은, 그리고 심지어 평범한 독자들까지도 그녀의 허욕을 비판하고 이 기회에 자신의 삶에 감사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녀를 한 번쯤은 이해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살며시 입을 떼본다. 그 시대에 그녀가 꿈꿀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은 상류층 사회뿐이었고 그 곳으로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남자의 사랑'이었으므로. 그래서 이 남자, 저 남자의 손에서 놀아난 게 아니었을까. 당시 여성이 공부를 하고 직업을 가져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완성하기란 참으로 막.막.한 일 아니었을까. 매일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는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나라로 여행을 가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새로운 도시를 돌아다니며 처음 만나 본 사람들과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마음껏 이야기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파티에서 본 수많은 상류층의 여자들. 그녀들의 화려한 옷과 값비싼 목걸이들이 탐났을 수도 있다. 왜 안 그랬겠는가. 그녀는 어리고 아름답고 싱싱한 여자였는데. 그녀의 손톱은 너무나 하얗게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으며, 속눈썹 때문에 검게 보이는 갈색 눈동자는 참으로 그윽했었는데. 그런 것들이 부럽고 탐이 났고, 그것을 얻으려면 보다 능력있는 남자의 사랑이 있었어야 했다. 그녀의 사치와 불륜은 그렇게 시작된 게 아닐까.


또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당시에는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으며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은 고작 결혼이 전부였다는 그런 페미니즘적 논의가 아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엠마의 허물을 덮어주면 안 되는 것일까. 그래, 그녀는 허영 덩어리였고 능력도 없었으며, 그런 주제에 더 높은 것을 꿈꾸는 망상의 소유자였다. 그러면 엠마는 우리로부터 사랑 받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런 사람은 모두로부터 항상 외면당해야 되는 것일까. 네가 잘못했으니 손가락질 받고 비판 받는 게 당연하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냉혹하고 무서운 일일 수도 있다. 우리라고 해서 완벽한 것은 아니며, 무결점한 존재 또한 아니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도 불완전한 존재이면서도 타인으로부터 따뜻한 애정을 받기 원하고 누군가 자신의 결점까지도 감싸안아주길 바란다. 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식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확률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어린 아기였을 때는 그저 밥을 먹거나 웃기만 해도 모두들 사랑의 눈빛을 보내주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승진을 한다거나, 실적을 낸다거나, 소위 훌륭한 일을 하거나 고상한 인품을 보여줘야지만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애정을 받을 수 있다. 무엇인가를 잘못한다거나 무능하다거나 미성숙하면 모두로부터 외면당한다. 어쩌면 그래서 어른들은, 그리고 인간은 갈수록 외롭고 고독해지고 추워지는 게 아닐까.


뭐, 그래서 인류는 서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둥 박애정신이 필요하다는 둥, 그런 거창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리고 픽션 속에서도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지만 엠마는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 냉엄한 정죄 속에서 혹시 아프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보는 것뿐이다. 어쩌면 엠마는 죽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의 온기를 그렇게나 바랬을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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