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 개정판
쇼펜하우어 지음, 김재혁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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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어찌나 황당한지 '이게 그 유명한 쇼펜하우어가 쓴 논문이란 말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쇼펜하우어, 라고 하면 왠지 어렵고 심오할 것 같았는데. 그런 나의 기대가 보기 좋게 무너졌다. 복잡한 이론들만 쏟아낼 것 같던 그의 논문은 너무나 유치했고 나의 배에서는 낄낄, 어이없는 웃음이 다 나왔다. 이런 논문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쓸 수 있겠다.

확대해석하라, 느닷없이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질문하라,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어라(상대방의 화를 돋우려면 상대방에게 노골적으로 악담을 하거나 트집을 잡으면 된다. - 이런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상대방이 자살을 옹호하면 우리는 지체없이 '그러면 왜 당신은 목을 매지 않습니까'라고 소리치면 그만이다, 상대가 억지를 쓴다고 큰소리로 외쳐라...


그의 논문을 읽고 있자니, 마치 수준 낮은 초등학생들의 싸움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한 방법들은 실제 토론에서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목소리 크게 우기는 데는 도가 없으니 말이다. 그 모순이 더욱 흥미롭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이 논문을 쓴 목적은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토론술을 제시해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를 쓰라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떼를 쓰는 사람들의 부정직한 방법들을, 진실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재빨리 알아차리고 물리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피카>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아무나 상대로 닥치는 대로 논쟁을 벌이지 말고, 자신이 아는 사람으로서 결코 불합리한 것을 내세우지 않고 만약 그럴 경우 스스로를 창피하게 여길 만큼 충분한 분별력을 지닌 사람들과만 논쟁을 하라. 그리고 권위적인 명령이 아니라 근거를 가지고 논쟁을 하고 우리가 내세우는 근거에 귀를 기울이고 또 거기에 동의할 수 있을 만큼 분별력을 지닌 사람과 논쟁을 하라. 그리고 끝으로 진리를 높이 평가하고 비록 논쟁의 적수의 입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정당한 근거라면 거기에 기꺼이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 또 진실이 상대방 측에 있으면 자기 의견의 부당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과 논쟁을 하라."


닥치는 대로 아무나와 논쟁을 벌이지 말라는 쇼펜하우어의 조언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한다."라는 우리나라 속담과 일맥상통한다. 미성숙한 사람을 일단 피하고 보라는 그의 조언은 옳은 것일까.


만일 내가 뻔뻔하게 목소리만 높이는 사람들과 토론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아직은 내가 그런 후안무치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는 수준이라면, 일단은 그를 상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괜히 그와 토론을 한답시고 마주앉아 있다 보면 금세 둘 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싸우고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도 확대해석하고, 이성이 아닌 권위에 호소하고, 의미없는 말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며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방법들을 유감없이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상대방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 미성숙한 사람과 토론을 하고 싶다면, 그의 잘못된 생각과 태도를 교정해 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질 때까지 자중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설익은 내가 섣부르게 상대방과 논쟁을 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간섭하게 되고, 잔소리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대방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비난하고 경멸하는 오만과 독선에 빠지게 된다. 이 얼마나 눈살 찌푸려지는 경거망동인가.


더 나아가 상대방의 어리석음과 미성숙한 행동들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함부로 논쟁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충분히 깊은 맛을 낼 때까지 혼자 속으로만 삼키고 삼키는 자의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도 무게가 있다. 상대방이 삿대질하며 화낸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지 않아도 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사람들에게 준 상처 때문에 혼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너그럽게 미소로 모든 것들을 지나칠 수 있을 때까지, 그 때까지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포용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우선은 많은 경험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의견을 접하고 내 주장과 반대되는 주장들과 싸워보면서 수백 가지에 이르는 상황과 저항에 부딪혀 보는 것. 싸워보기도 하고 수긍해보기도 하고 반대로 내 고집을 부려보기도 하는 과정들이 모여야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나의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의 깊이도 깊어질 것이다.  토론 혹은 말싸움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주었던 상처들에 대해 남몰래 반성도 해보고, 오늘 아무개에게 했던 인신공격을 잠들기 전 생각하며 눈물 나게 부끄러워도 해보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 뼘 더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나 닥치는 대로 상대하지 말라는 쇼펜하우어의 충고는 결국 일단은 모든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지는 걸까. 묵직한 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침묵하자는 앞의 말과 모순되기는 하지만, 은은한 울림을 낼 수 있을 때까지 젊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치열한 고민과 싸움일 것이다. 열심히 상대방 주장을 확대해석 하면서 끝까지 고집을 부려볼까나~

p.s. 쇼펜하우어.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경멸적인 시선과 세상의 거짓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 그의 오만함 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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