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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최초의 기억. 이 단어가 다가왔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기억의 첫 장면은 뭘까... 조금은 들뜬 설렘으로 천천히 시간을 되돌려 본다.
호선이가 생각난다. 6살인가, 7살인가 옆집에 살고 있던 내 친구. 내 첫번째 친구다. 잘 살고 있나? 그의 소식이 궁금해진다.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살던 아파트 그 층에는 내 또래 애들이 별로 없었는지, 그 때 동네 친구는 호선이랑 저쪽 끝 호수에 살고 있던 자매 두명이랑 이렇게 셋이다. 그런데 그 자매들은 좀 못된 구석이 있어서 어렸을 때도 그들이랑은 잘 어울리지 않았다. 매일 매일 호선이랑 내 여동생이랑 그렇게 셋이 종이비행기도 만들고 고무줄도 하고 바람개비도 만들고 간식도 같이 먹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기억은 참 따뜻하다. 보고 싶다.
잠시 유치원을 옮겼던 장면도 생각난다. 왜 잘 다니던 유치원을 갑자기 바꾸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당시 친구들과 서먹하게 지냈던 일이 생각난다. 공주처럼 예쁘게 생긴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가 바닥에 치맛자락을 나팔꽃처럼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내가 놀다가 잘못해서 그 아이의 치마 위에 앉았는데 '뚜둑' 소리가 났다. 그 때 그 친구가 나한테 신경질을 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참 낯설었다. 원래 다니던 유치원에서는 애들이 다 털털했었는데.
원래 다니던 유치원 기억도 많이 난다. 정은실 선생님이랑, 유치원 위치랑 구조, 사모님, 친구들, 기도를 배운 거랑, 성경 구절을 암송 하던 거랑, 매일 나를 바래다 주던 유치원 봉고차도. 그런데 이 때의 기억은 아마 7살 때의 기억이어서 최초의 기억이라고 하기엔 다소 늦은 감이 있다.
곰곰히 기억을 더듬어 봐도 7살 더 이전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 시절, 나와 모든 시간을 함께 했던 여동생에게 너의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지를 물어봤다. 모든 사건에 대해 별별 것을 또렷이 기억하는 내 동생은 역시 나보다 훨씬 풍성한 장면들은 갖고 있었다. 주공아파트에 살 때 아파트 베란다 밑 화단에 나무 막대기를 줍고 싶었는데 우리가 무서워서 그 막대기를 못 주워서 이모가 나와 막대기를 주워준 적이 있었단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동생이 베란다에서 또 막대기를 발견했는데 그걸 못 주워서 내가 이모가 했던 것처럼 막대기를 주워 동생에게 주었단다. 동생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그 베란다랑 내가 용감하게 베란다 밑에 기어들어가 막대기를 주웠던 일이 생각난다. 또 유치원에서 갯벌로 소풍을 가서 꽃게를 잡았던 일이랑 가족들과 놀러 갔던 시냇물도 떠올랐다.
기억의 조각들. 5살인지, 6살인지, 혹은 7살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은 장면, 장면들. 위 에피소드 중 어느 것이 내 생애 최초의 사건인지 분명하지 않은 뿌연 화면들.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조각조각나 무질서하게 떠다니는 사진들.
왠지 생애 최초의 기억이라고 하면 무언가 거창한 것 같고, 대단한 장면이 떠오르리라 기대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아니면 아기 때 기억이니까 아기자기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이미지를 연상했는데. 따뜻한 햇살이나 연둣빛 잔디, 부드러운 이불, 뭐 이런 것도 아니었다. 화창한 오후와 꼬물거리는 아기,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내딛는 축복받는 생명체. 최초의 영상으로는 이런 이미지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이런 신비롭고 평화로운 장면은 커녕, 명확하고 선명하지도 않다. 생각을 더듬으면 더듬을 수록 아무런 연속성 없이 툭툭 튀어 나오는 사건들이 어지럽다. 뭐가 이러냐. 아쉽고, 무언가 매우 소중하고 귀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섭섭하다.
최초의 기억은 행복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무엇이었으면 했다. 그래서 힘들고 지칠 때 가끔씩 그 기억을 떠올려, 위로를 받았으면... 했다. 마치 예쁜 꽃이나 평화로운 사진을 보면 마음이 회복되는 것처럼. 그 어떤 누군가에게서도 위안을 받을 수 없을 때, 그런 때 혼자 꺼내어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도록. 그래서 그 누군가도 대신할 수 없는 슬픔을 혼자 감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따뜻한 사진이었으면, 했다.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30년을 넘게 살아보니, 갈수록 타인의 위로가 부질없이 느껴지는 일들이 많고, 또 타인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과 이야기하면 안 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래서 혼자 조용히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장면을 기대했었다. 그랬는데... 너무 큰 기대를 혼자 했던 걸까.
앞으로는 봄날 나른한 오후 같은 기억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여유있고 편안하고 모든 것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온화한 미소가 감돌고, 잔잔한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힘듦도 없는. 그런 장면들. 음... 내 생에 최후의 기억은 그렇게 마무리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