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사바하틴 알리 지음, 이난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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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는 사랑 이야기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튀르키예 청년이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기 위한 숙련 과정으로 독일 베를린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마음속에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운명의 여인, 마리아 푸데르를 만나면서 펼쳐지는 한 남자의 사랑의 파노라마이며 감정 서사시이다.

 

이렇게 사랑의 이야기라고만 적어두고 그들의 사랑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게 된다면 내 안에서는 정작 하지 못한 말들이 나를 괴롭힐 것이기에 차분하게 내 생각을 따라가 보려 한다. <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 나에겐 사랑 이야기보다 한 남자의 슬픈 인생사로 읽혔고, 그의 인생이 누구랄 것 없는 우리의 인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책을 덮고 한없이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상대방에게 진실하고, 어떤 장애와 역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상대방에 대해서는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내 모습이고, 누구나의 모습일 것이다. 나를 믿는 만큼 상대방을 믿을 수 있다면 오해 속에 멀어지는 관계가 없을 텐데 우리는 내가 만든 오해와 불신 속에서 그 사람의 진심을 알기도 전에 기회를 놓치고 만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에 대한 내 신뢰는 허상이고, 마음 저변에 깔린 스스로에 대한 자기 불신과 자신 없음이 그대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투영되는 것이 아닐까. 자기 안의 상처와 소심함에서 비롯되는 의심과 불안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 그래서 주인공 라이프처럼 "주변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들이 시간이 지나 이 외로움으로부터 도리어 자부심과 고통스런 희열을 느끼" (48쪽) 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사는 동안 늘 그녀를 찾고 기다렸다. 주의를 집중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사방에서 그녀가 남기는 작은 흔적이라도 찾으려 애썼다. 쓰디쓴 경험을 거쳐 비로소 통찰력을 갖게 됐는데 어떻게 틀릴 수 있단 말인가?" (150)

 

"영혼이 짝을 찾으면 구차한 설명 없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제야 우리는 진정으로, 영혼을 갖고 살기 시작한다. 모든 망설임과 부끄러움을 제치고 모든 규범도 뛰어넘어, 두 영혼은 서로 부등켜안는다. " (152)

 

라이프는 운명 같은 마리아를 만나 비로소 자신에게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으며 세상에 오직 그 한 사람만 존재하는 듯이 살아간다. 모든 이성과 감성이 그녀를 향하고 그 사람이 없으면 자신의 인생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처럼 온 삶이 그녀에게 집중한다. 그런 영혼의 동반자를 만난 것은 너무도 다행이지만 라이프는 자신의 불신과 의심으로 인한 오해로 결국 허망한 세월을 보내고 만다.

 

"세속적인 행복이든 물질적인 재산이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하지만 놓쳐버린 기회들은 뇌리에서 절대 떠나지 않고 불쑥불쑥 떠올라 쓰라리게 마음을 헤집는다. 어쩌면 우리가 놓지 못하는 건 떠나간 기회가 아니라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는데!라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미련일 것이다. 미련만 벗어던진다면 우리는 모든 걸 운명이라고 돌리고 받아들일 테니까! " (273)

 

실패의 좋은 점은 더 나은 선택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알게 된다는 것에 있다. 이별도 사랑의 실패라고 한다면 사랑에 있어 내게 부족한 점과 내가 바라는 사랑, 내게 맞는 사람에 대한 안목이 힘든 이별 앓이를 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일 텐데 라이프는 그런 기회마저 놓친 비련의 주인공이다.

 

온전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일생을 두고 이루어가야 하는 과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 중에 내 성격에 지대한 공헌을 한 내 안의 상처를 보듬고, 상처를 준 사람과 나를 분리하고, 용서하고 나를 타인의 시선이 아닌 오롯이 나로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내적 힘을 기른다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만큼, 나를 찾아온 사람과도 안정감 있는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도피처도 아니고, 내 쉴 곳도 아니며 내가 평생 의지할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란 걸 이제는 안다. 그리고 내 삶에 사랑이 다가 아니며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도 안다. 관계에서 누리는 쉼과 안정감은 애써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관계에서 절로 따르는 것이라는 것도.

 

"자연의 섭리는 내 정신세계에서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다른 건 다 잊고, 우리의 우정도 자연의 섭리를 따르도록 놔둡시다. 억지로 방향을 정하거나 섣부른 결정을 내려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자고요." (177)

 

섭리를 따르는 것. 애써 부정할 수 없는 절묘한 타이밍과 서로가 주고받는 호기심과 내 맘을 움직이는 영적 매력을 따라 자연스레 흘러가며 하나가 되는 것.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급할 것이 없고, 어느 때든지 내 사람이 오리라는 확신 가운데 내게 주어진 오늘에 충실한 것이 사랑을 맞이하는 최선의 태도일 것이다. 라이프의 인생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나 또한 아픈 이별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에 대한 이해, 사람에 대한 이해를 우리는 아픈 이별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직접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깨달음도 있으니 아픔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것. 어쩌면 신이 숨겨 놓은 신비는 그런 아픔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는데도 우린 같은 결론에 도달했군요. 우리 둘 다 한 사람을 찾고 있네요. 우리와 같은 사람을요"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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