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생활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신은 어떤 생활을 원하십니까?”

97세의 프랑스인이 어느 일본인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일본인의 질문은 “앞으로 일본인은 어떤 주거 방식을 선택하면 좋겠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고 기억한다.

이것은 1998년 가을 OZONE에서 열린 ‘샤를롯 페리안’전의 오프닝에서 오고 간 대화였다. 1999년 98세로 돌아가신 건축가 페리안 씨는 르코르뷔지에의 파트너로서 가구 디자인으로도 유명하다. 일본에도 두 번 방문했다.

나는 그 답변을 들었고 쇼크를 받았다. 맞다.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모르는 한, 아무리 유명하고 우수한 건축가와 디자이너에게 일을 의뢰하더라도 뭔가 될 수가 없다.

나로서는 이런 당연한 일을 제대로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 참 부끄럽다. 하지만 많은 일본인들도 이런 상태이지 않을까.

서양과 비교해 일본인의 주거의식이 낮다고들 한다.

전쟁 후 폐허에서 출발해 아무래도 살 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서부터, 주거의 질은 상관 않는 상태로 50년 이상을 지내 왔다. ‘옷과 음식이 충분하니 주거를 알겠다.’고 말한 게 누구더라. 50년이 지나서야 결국 생활의 질을 추구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과거는 과거다. 앞으로 어찌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일본인과 주거’라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 직장을 옮기기 전에는 ‘주거’라 하면 잠자리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주거가 뭔지 생각할 일도 없었다.

내 경제력으로는 제대로 된 집에 살 수도 없다. 돈만 있으면 어떨지 몰라도 난 없다. 하지만 돈만 있다고 좋은 집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연예인, 정치가, 부자들이 모두 좋은 집에 살고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대부분이 겉만 번드르르한 큰 집에 살고 있는 것뿐이라는 느낌이었다. 물론 가난한 나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나는 어떤 생활을 하고 싶은 걸까?”

“누구와 어디서 어떤 집에 살고 싶은 걸까?”


집에 맞추어 생활을 생각한다

1층 9평, 2층 6평, 모두 15평이다. 3×3평의 정방형인 집. 우리들 가족 네 사람은 이 집에서 살게 된다. 어떤 생활양식이 좋을까.

보통 집을 신축할 때는 그 가족의 생활방식에 맞추어 집의 형태와 기능을 결정한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성품이 아닌 집 짓기이니까 가족의 생활에 맞추어 집을 주문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그 가족밖에 살 수 없는 집이라니, 그런 게 정말 있을까.

아마 어느 정도는 누구라도 살 수 있는 요소가 필요하다. 특별한 집이 아닌 보통의 집. 기본적인 집. 아마도 1952년 당시 마쓰자와 씨도 그런 생각을 하며 자기 집을 만들었을 테지. 누구나 살 수 있는 일반적인 집. 4인 가족 정도가 기분 좋게 살 수 있는 집을 목표로 했겠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집은 50년 이상 지난 지금도 일반적인 집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요즘의 주택 기준은 방 몇 개, 넓이 얼마 등으로 따진다. 집을 크기로 판단하는 세상이다.

방이 몇 개인가가 가장 중시된다. 부동산 광고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다. 집 가격을 올리려는 의도일까. 방의 숫자만으로 집의 가치를 이해하는 일본인이 많아서일까. 원래 넓은 집에 무리해서 방을 여러 개 만들면 점점 더 좁은 집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많은 건축가들이 방 몇 개, 하는 식의 사고방식으로 집을 만드는 것을 이제 좀 그만두면 좋겠다.

마쓰자와 주택은 방 몇 개 식의 사고방식으로 만든 집이 아니다. 어찌 보면 방 하나짜리 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도 바람이 통하는 공간이 있어 입체적인 원룸이다. 개인의 방은 없고 침실은 문으로 구분해 두었을 뿐이다. 누가 떠들면 그 소리가 집 전체에 울린다. 집 어디에 있든지 가족의 기운이 느껴진다.

우리 가족은 이 원룸 같은 집에 맞는 생활방식을 찾을 필요가 있다. 이 집에 살기 위해 어떤 생활방식이 적당할까.

신축임에도 불구하고 생활에 맞춘 집을 생각하지 않고, 집에 맞춘 생활을 생각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와 반대라면 반대이겠지만, 임대아파트 같은 경우에는 그곳에 맞는 방식을 찾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생활과 주거방식이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멋진 집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의 주거방식이 좋지 않다면 좋은 집은 가능하지 않다. 우린 그런 생각들에 쫓기고 있었다.

이 최소한 주거 주택에 살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아무리 리디자인이라고 해도 그 원형이 전후 주택사에 남은 명작이니 말이다. 집은 좋은데 사는 사람이 별로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지만, 집에 맞추어 답답한 생활을 하기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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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그날의 회의는 고이즈미 씨의 사무실이 있는 구니타치에서 열렸다. 마누라와 스미레, 아오이도 함께였다. 고이즈미 씨는 집도 구니타치였다. 집과 사무실이 멀지 않은 생활을 실현시키고 있었다. 부럽다. 프리랜서여서 가능한 일이겠지, 월급쟁이에게는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구니타치에서 고엔지로 이사해, 전차 탑승 시간이 30분에서 7분으로 줄어들었고 그만큼 스트레스도 놀랄 만큼 줄어들었다. 택시로 귀가하더라도 예전만큼 부담스럽지 않아 전철 막차 시간 고민 없이 마시게 되었다.

직장과 집이 가까운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나 원거리 통근자가 많은 건 국가와 기업과 철도회사가 유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돈을 벌고 있는 건 철도회사뿐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철도회사는 주택지 개발에도 손을 대고 있다. 수상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은 아주 중요한 회의였다. 도와 주고 있는 사토 씨도 참가해 설계에 관해 기본적인 것을 말 그대로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했다.

그때까지 설계에 관한 주도권은 어느 쪽에 있었냐고 하면 나였다. 고이즈미 씨는 내 얘기를 들어 주는 쪽이었다. 그리고 그날을 경계로 고이즈미 씨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사토 씨도 든든했다. 나카무라 요시후미 씨의 사무실에서 일을 한 덕에 구조나, 법규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다.

2층에 있는 금속접합부를 없애도 구조적인 문제가 없는지, 천장을 늘려 지붕과의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여름의 더위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킬 수 있는지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더욱이 그날의 초점은 남면의 출입구 부분을 어떻게 할까였다. 볕도 잘 들어야 하지만 프라이버시도 중요하고 마누라에게는 어디에 빨래를 널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고이즈미 씨는 건물의 남면에 세탁물을 말리기 위한 도구를 걸어 두는 걸 끝까지 반대했다. 남측의 시원한 외관은 어떻게든 실현하고 싶어 했다. 원 주택에서 남면 넉 장의 거대한 창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스미레 아오이 하우스는 나무살 없이 거대한 유리창을 실현시킬 것이다. 이것이 1952년과 98년의 기술 차이겠지.


“창틀은 어떻게든 나무로 하고 싶네요.”

이게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알루미늄 창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왜일까. 전날 이바타 씨도 나무로 틀을 짜는 것은 문제없다고 했다. 솜씨 좋은 전문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설계 도중 고이즈미 씨가 “역시, 알루미늄 새시로 하는 게 쾌적하게 만들어지겠네요.”라고 하거나 이바타 씨가 견적을 보며 “알루미늄 새시로 하면 좀 더 싸질 텐데.” 하는 걸 보니 몇 번이나 나무틀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제와 돌아보면 스미레 아오이 하우스의 창이 나무틀로 완성된 것은 기적이다.

게다가 초점이 된 것은 남면의 창에 장지를 넣을지 여부였다. 마쓰자와 주택은 실내에서 바라본 넉 장의 인상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이 장지를 실현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도 가격이나 기한을 생각했 때 롤스크린이나 블라인드로 하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커튼이라면 정말 싫지만 블라인드 정도라면 괜찮다 생각했다. 장지를 고집했던 건 마누라였다. 이유도 밝히지 않고 주장했다.

“이 집은 장지가 아니면 안 된다고요.”

모두들, 왜 그런지 묘하게 납득당해 장지를 만드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결론적으로 대단히 잘한 선택이었다.


기둥은 노송나무, 들보는 삼나무를 썼다.


바닥재와 다다미, 월도지를 사용한 장지문은 직접 구해 시공했다.

장지문을 통해 은은한 빛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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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주거(最小限住居). 

1952년에 세워진 마쓰자와 씨의 자택에 붙은 이름이다. 당시 주택 규모로 보자면 결코 좁다고 할 만한 규모는 아니다. 작은 가운데에도 가능한 주거의 질을 중시하는 최대한 노력의 주택이다. 이 작은 집에는 ‘풍족한 공간’, ‘선진설비’, ‘새로운 생활의 제안’이 담겨 있다. 그것도 결코 사치스럽지 않은 일반 샐러리맨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 증거인 이 집은 27세의 젊은 설계사무소 직원 마쓰자와 씨가 주택금융금고의 융자를 받아 실현시킨 것이다.

‘풍족한 공간’이란 것은 한마디로 하자면 ‘바람이 통하는 공간’을 실현시킨 것이다. 아홉 평 중에 세 평이 이 공간이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뚫린 천장 높이 4미터의 공간이다. 1층과 2층을 공간적으로 연결해 훨씬 더 넓은 느낌을 받는다. 넓이와 바닥 면적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건축은 바닥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는 방식에만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새로운 생활양식’으로서 접객 중심인 현관을 없애고 가족 중심의 생활을 목표로 하는 것과 다다미를 없애고 의자와 침대 등의 서양식 생활을 실현시켰다. 그렇지만 신발을 벗는 습관만은 역시 버릴 수 없었겠지.

1층의 동쪽에 부엌과 세면대, 화장실, 욕실 등 물을 이용하는 공간이 늘어서 있고 부엌 옆 남쪽에는 바람이 통하는 기분 좋은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를 두어 식사하는 공간으로 삼는다. 집의 입구에는 신발장을 둔다.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은 한군데 더 있는데 부엌문이다. 그리고 북측에는 장지로 구분한 침실이 있고 더블 침대와 아이용 침대가 있다. 침대 밑에는 수납공간이 있다. 침실에는 화장대와 붙박이장이 설치되어 있다.

욕실은 침실에서 들어가게 되어 있어 침실이 탈의실이 되기도 한다. 계단을 올라가면 서재와 가사실이 있다. 서재에는 소파침대와 의자 책상, 제도판이 있다. 마쓰자와 씨는 독립한 후 한동안은 여기서 업무를 봤다. 가사실에는 작업대와 재봉틀, 벽장이 있다. 보면 볼수록 활용이 잘 되어있는 집이다.

1999년에 완성할 스미레 아오이 하우스는 과연 어떤 최소한의 주거, 아니 최대한 노력의 주거를 보여 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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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누구랑 살 생각이에요?”

땅 계약이 끝나고 설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시점에 마누라가 물었다.

“설마 고이즈미 씨와 살 집을 만들려는 건 아니죠?”

스미레 아오이 하우스의 설계에 관해 나와 고이즈미 씨 둘이서 너무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고이즈미 씨와 회의할 때 가능하면 마누라도 참석시키기로 했다.

어떤 건축가 말로는 회의에 부부가 함께 참석하지 않으면 그 집의 설계는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는다고 한다. 남편 또는 마누라 한쪽만 참석할 경우 나중에 분명 문제가 된다고 한다.

물론 함께 살 가족 모두의 의견이 중요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살 집에 대해 요구가 있기 마련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건축가도 가족 전원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고 계획을 잡아야 한다. 가족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문제가 많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 가족도 고이즈미 씨를 굉장히 곤란하게 만들었다.

나와 마누라의 의견이 달라 어느 쪽을 중시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을 테니까.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무리한 주문도 많았다. 처음 한 소리를 뒤집고 변덕을 부리기도 한 우리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해 반영한 고이즈미 씨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세어 보니 착공에 들어간 5월까지 마누라와 함께 고이즈미 씨를 만난 것은 여덟 번이다.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한 것은 땅 계약을 완료한 3월부터이니 2주에 한 번 정도 만났다.

회의 외에도 고이즈미 씨와 이바타 건축에 가거나, 마누라 따돌리기 작전을 세우거나, 업무 관계로 만나거나 했다.

고이즈미 씨는 팩스를 이용해서 여러 가지를 조정해 주었다.

나는 설계를 시작할 무렵 생각난 일, 요구조건, 아마추어로서의 아이디어 등을 계속 고이즈미 씨에게 팩스로 보냈다. 여기에 대해 고이즈미 씨는 일일이 답변을 적어 팩스로 다시 보냈다.

보통 집의 설계는 1년 정도의 시간을 들여 하는 것이 좋다고들 한다.

우리는 기둥을 이미 갖고 있긴 했지만 집 짓기로 마음먹은 1월 9일부터 10월 말 안에 완공해야 한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땅 계약이 2월 말이었으니 3개월 안에 설계를 끝내야 했다. 설계 기간은 3개월뿐이었다. 정말 6월에 착공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고이즈미 마코토 씨.

1960년 도쿄 태생. 현재는 생활용품부터 

가구, 공간, 건축까지 생활에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을 디자인하고 있는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다.


1996년 OZONE에서 개최된 ‘고이즈미 마코토의 맛있는 스툴 전’ 전람회장. 사진의 앞에 보이는 것이 ‘주먹밥 스툴’, 뒤에 보이는 것이 ‘햄버거 스툴’이다. 하얀 전시 공간을 스티로폼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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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바닥파'
나는 아홉 평의 집을 지을 수 있는 땅과 예산만 머릿속에 가득해, 그 땅 주변의 환경이나 우리들이 살아야 할 장소라는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실제 물건들을 돌아다니며 보니, 어떤 환경에서 살고 싶은가 하는 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건에 맞는 물건들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만으로 긍정적인 기분이었다.
이왕이면 가능한 우리 조건에 맞는 장소를 고르자고 마음먹었다. 마누라도 점점 더 신중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결혼한 스물일곱 살까지 태어나서 쭉 살아온 곳은 도쿄 외관의 구니타치 역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부모님이 세운 단독주택이었다. 주변에는 밭이나 잡목림이 많다.
어쨌든 이사 왔을 때는 역까지의 사이에 거의 집이 없었다. 지금은 빈 공간이 거의 없는 곳이 되었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공터가 많아 언제나 그곳에서 놀았다.
일하기 위해 도쿄로 나온 마누라는 고등학교 때 히로시마 외곽의 단독주택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일본 삼경(三景) 중 하나인 미야지마 섬이 바다 건너 보이는 멋진 위치에 있는 집이다.
즉, 우리 둘 모두 도시 외곽에서 살아왔다. 그것도 주변에 자연환경이 넉넉한 주택가였다. 살고 싶은 집 주변 환경에 대한 의견은 살아온 배경 탓인지 거의 일치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은 싫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산속에 살자는 것은 아니다. 자연도 있고 살기 편한 마을이면 좋겠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 정도다.
물론 고층빌딩은 안 된다. 2층 정도가 한계랄까. 이제까지 3층 이상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 고층아파트는 전망은 좋겠지만, 가끔 놀러가는 정도라면 몰라도 매일 사는 건 무리다.
우리들은 바닥파다. 땅이 가까워야 한다.




작은 집에 어울리는 장소는 어딜까

마쓰자와 주택의 남면에는 한 칸. 즉 1.8미터 폭의 창문이 1층, 2층 두 장씩 도합 넉 장이 있다. 작은 집치고 상당히 큰 편이다. 집 중간에서 남측으로의 개방감이 대단하다. 물론, 아직 어떤 식의 집으로 할까 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토지를 찾을 때 어디까지나 마쓰자와 주택을 머리에 두고 있었다. 남측 면이 좁아 답답하지 않고 열려 있는 토지 말이다. 이 지역의 토지를 찾다 보니 예산이 어느 정도 모자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남측에 공원 또는 녹지가 있는 땅을 찾고 싶었다. 생각한 대로 조건에 맞는 토지가 있을까. 다만 그 대신이라기는 뭐하지만, 역에서 떨어져 있더라도 괜찮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걷기에 멀고 버스가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작은 집의 면적을 근거로 토지를 찾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우선 토지가 있고 그 주변 환경에 어울리는 집을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라 생각했던 나에게는 그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바닥 면적 60제곱미터 단층집의 도면으로, 그 집에 어울리는 작은 토지를 찾는 이야기였다.

그 집을 설계해 토지를 찾은 것은 누구라도 알 만한 근대건축의 거인, 르코르뷔지에였다. 레만 호수 부근의 땅을 찾은 것은 1923년이었다. 이 집은 부모님이 노후에 살 집이었다. 우선 집이 있고 토지를 찾는다. 이런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일반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그러고 보니 마쓰자와 주택을 옮겨 살고 있는 요도가와 씨는 자택을 해체하기로 한 마쓰자와 씨로부터 돌연 “이 재료를 가져가서 집을 지으라.”는 말을 듣고 당황해서 토지를 찾았다고 한다. 다행히도 처갓집의 땅에 집을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토지가 없다. 자력으로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1개월이라는 기한이 있었다. 아니다. 이제 3주밖에 없다.

과연, 르코르뷔지에처럼, 작은 집에 어울리는 토지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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