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멕시코 수집가 에두아르도 플로레스가 젊은 남자를 대동하고 들어섰다. 플로레스의 전담 딜러 게일 스마일리도 함께 왔다. 게일 스마일리는 플로레스가 래리 가고시안 귀신에 홀릴세라 늘 그의 옆에 따개비처럼 붙어 다녔다. 다음에 도착한 사람은 사울과 에스텔 네이던슨 부부였다. 나는 『아트뉴스』의 발 넓은 명사 동원력에 놀랐다. 그때 배우 스털링 퀸스와 애인 블랑카가 들어왔다. 나는 이들이 이날의 주빈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얼마 안 있어 몸은 아흔한 살이지만 마음은 열아홉인 여인이 방에 들어섰다. 그 순간 이 만찬의 취지가 분명해졌다. 그 여인은 화가 도로시아 태닝(미국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문학가)이었다.

태닝은 일리노이 태생으로, 독일인 막스 에른스트(독일의 초현실주의 화가)를 만나 결혼하고, 파리에서 초현실주의자 무리를 비롯해 다양한 ‘~주의자’들과 어울리며 본인의 미술세계를 꽃피웠다. 당시 태닝이 어울리던 무리는,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이브 탕기, 마르셀 뒤샹, 후안 미로,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파블로 피카소, 무엇보다 막스 에른스트였다.’

 

 [도로시아 태닝, 「소야곡」, 1943년]


태닝은 1970년대 말 귀국해서 10년간 초현실주의 화가로 명성을 쌓다가, 여든 줄에 들어서 『뉴요커』를 비롯한 여러 문화예술지에 시를 기고하기 시작하면서 문학가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었다. 거기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곧 태닝 회고전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 때문에 태닝과 태닝의 그림들, 특히 그녀를 거장의 반열에 올린 1943년 작 「소야곡」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물론 『아트뉴스』에서도 그 이야기를 다뤘다. 태닝은 “살아 있어서 미안합니다.”라는 인사말로 등장부터 모두를 휘어잡았다. 좌중에는 레이시가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어째서 레이시가 이런 자리를 포기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다 레이시가 우리를 놓친 게 아니라, 우리가 레이시를 놓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돈 그리고 음모

레이시 이야기

스티브 마틴 지음, 이재경 옮김, 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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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보이스 알죠?” 벤이 말했다. “우리는 보이스의 펠트 양복도 한 벌 샀어요.”
레이시도 보이스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탤리 갤러리에서 보낸 세월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펠트 양복」은 보이스의 1970년 작품으로, 같은 작품을 백 점 제작했다. 옷걸이에 양복 윗도리와 바지를 입혀서 벽에 걸어 놓은 형태였다. 얼른 보면 양복을 입은 투명인간 같았다.

 

 [요셉 보이스, 「펠트 양복」, 1970년] 


“그것 때문에 아주 웃긴 일이 있었죠.” 벨린다가 말했다.
“우리 갤러리 오프닝 날이었어요. 축하 만찬을 할 때요.” 벤이 말했다. “그게 언제였지, 여보?”
“90년대 초반이요.” 벨린다가 말했다. “우리가 갤러리를 오픈한 게 그때잖아요.”
보그스 부부는 코네티컷의 저택에 개인 갤러리를 가지고 있었다.
“오프닝 파티를 대대적으로 열었죠.” 벨린다가 말했다.
“그날 나는 턱시도를 입었어요. 그런데 턱시도와 화이트 크림 케이크와 서투른 웨이터가 만나면 항상 일이 터지죠.”
“여기부터 진짜 웃겨요.” 벨린다는 이렇게 말하며 아까처럼 손바닥을 올려서 남편의 말을 막았다. “그래서 이이가 어떻게 했게요? 벽에서 펠트 양복을 벗겨서 화장실에 가서 그걸로 갈아입었어요. 이이가 펠트 양복을 입고 나오니까 박수가 터졌어요!”
“그날 손님들 대부분이 미술계가 아니라 금융계였어요. 우리가 운이 좋았죠. 그래도 전설적인 얘기가 됐어요.”
레이시는 웃었다. 하지만 레이시는 보이스가 감상적인 아티스트였고, 「펠트 양복」도 진지한 작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펠트 양복」은 보이스가 전후 독일에서 느꼈던 전쟁에 대한 죄책감과 회한을 담은 작품이었다.
“입는 바람에 양복이 구겨졌어요. 그래서 다른 걸로 한 벌 더 샀죠. 하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었어요.” 벤이 말했다.
“구겨진 것은 털사에 있는 미술관에 기증했어요. 그게 뭔지 설명하니까 아주 고마워하더라고요.” 벨린다가 말했다. “벤이 한 번 입었다는 말은 안 했어요. 스팀다리미로 주름을 펴서 줬어요.”
식사 중반에 벤은 이미 취기가 역력했다. 벨린다는 계속 주절댔다. 그 와중에 벤의 머리가 자꾸 빙글 돌면서 벨린다 쪽으로 기울었다. 집중하려 애쓰는 벤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레이시는 사람들이 보그스 부부를 자신의 엄마, 아빠로 알까 봐 겁났다. 레이시는 화장실에 갔다가 레스토랑 밖에서 두 사람과 합류했다. 벤이 자신의 차로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레이시는 사양했다. 벤의 취기가 자동차 기사에게까지 전염될 것 같아 무서웠다.

 

 

 

 

 

그림, 돈 그리고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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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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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 500톤의 철 구조물이 첼시 입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고시안 갤러리가 24번가에 새로운 전시 공간을 오픈했다. 새 갤러리를 오픈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았다. 래리 가고시안의 시기 세력은 은근히 고소해했다. 거기다 가고시안은 새 전시 공간에 설치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리처드 세라의 거대한 작품을 들이기로 했다. 그러자면 높이가 4미터에 육박하는 녹슨 코텐 강철판들을 옛날 페인트 공장 안에 세우고, 수개월 안에 옛날 페인트 공장을 번드르르한 갤러리로 탈바꿈시켜야 했다. 오프닝은 연기됐다. 괴물 같은 작품 운반에 필요한 크레인이 모두 그라운드제로의 잔해를 치우는 데 동원됐기 때문이다. 아트 쇼 같은 하찮은 일에 대절할 크레인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라의 거대한 강판들이 마침내 가고시안 갤러리 안에 균형을 잡았다. 모로 세운 종잇장처럼 늘어선 강판들 사이를 거니는 느낌은 놀라움 반, 무서움 반이었다.

 

 [리처드 세라,원환체와 구체의 사이, 2001년]


레이시는 자신의 2차 오프닝을 가고시안의 세라 기획전 일정에 맞췄다. 레이시는 라토냐 월시의 아슬아슬하고 알록달록한 그림들을 갤러리에 걸었다. 세라 기획전에 떼 지어 몰려드는 미술 애호가들로 첼시는 때 아닌 발동이 걸렸다. 세라 오프닝에서 흘러넘친 사람들로 레이시의 갤러리까지 북적였다. 그림들이 팔려나갔다. 이번에는 화가의 친지들이 아닌 진짜 수집가들에게 팔렸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소식과 사치스런 미술품 쇼핑이 동시에 거리를 활보했다. 누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멀리 있었다. 여기서는 평소대로 행동하면서 그런 무력충돌쯤 얼굴에 날아드는 파리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미술시장은 전례 없이 달아오를 태세였다. 미술계 관계자들과 지식층을 넘어서, 주식 투자가들과 금융계까지 첼시로 눈길을 돌리게 하는 엄청난 상승세가 시작되고 있었다.
레이시가 상상했던 오프닝이 바로 이런 오프닝이었다. 몇 개월 전 캐리 하든 기획전의 낭패는 이제 지난 일이 되었다. 레이시는 매력과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라토냐 역시 강렬한 외모를 자랑했다. 레이시는 라토냐의 지적인 면이 십분 드러나도록 도왔다. 그래서 라토냐가 수집가들의 눈뿐 아니라 뇌리에도 각인되도록 했다.
이번에는 파트리스 클레르도 왔다. 하지만 지인들과 어울려서 왔다. 그리고 캐리 하든도 왔다. 파트리스는 레이시와 캐리 사이의 비밀을 간파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아쉬웠다. 나는 이번 기회에 파트리스가 진실을 제대로 깨닫고, 그동안 묶여 있던 희망고문의 굴레를 벗어나기를 기대했다. 나는 레이시와 캐리의 하룻밤이 완전범죄로 넘어가는 것에 혼란을 느꼈다. 세상이 다 그런 걸까? 세상의 모든 배신이 이렇게 감쪽같이 덮어질 수 있나? 그렇다면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배신의 줄에 걸려 언제라도 재수 없이 자빠질 수 있다는 얘기였다.
파트리스는 레이시에게 나중에 술 한잔 하자는 말을 남기고 갤러리를 떠났다. 하지만 레이시는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고, 그도 레이시의 연락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을 마지막으로 파트리스와 레이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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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에도 계보가 있다면, 이 시대 시각미술은 차세대 유머를 미리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여전히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고 있을 때, 제프 쿤스는 25톤에 달하는 화분들로 높이 12미터짜리 강아지를 만들고,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유성에 맞아 자빠진 교황을 실물 크기로 만들었다. 카텔란은 교황상을 만든 다음해에는 갤러리 디렉터에게 남자 성기처럼 생긴 진홍색 코스튬을 입혀서 한 달 동안 갤러리 안을 돌아다니게 했다.

 

 

 

 

[ 마우리치오 카텔란, 「아홉 번째 시간」, 1999년]

 

레이시와 내가 갤러리를 떠나려 할 때였다. 입구가 떠들썩해지더니 새로운 무리가 들어와서 갤러리 가운데 있는 다른 무리 쪽으로 다가왔다. 순간 내 눈에는 두 은하가 서로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충돌 직전에 움직임이 멈췄고 두 무리는 하나로 합쳐졌다. 은하계 비유는 적절했다. 이 합체로 중심이 두 개인 은하계가 만들어졌다. 두 중심 모두 젊은 남자였다. 한 명은 전시회 작품들을 만든 아티스트였다. 하지만 정작 진짜 중심은 다른 남자였다. 레이시가 그쪽을 돌아봤다. 레이시가 그 무리에서 맨 먼저 알아본 사람은 여자였다. “젠장, 타냐 로스잖아.”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이번에는 좀 더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어라? 조나 마시네?” 레이시는 조나를 3년 만에 처음 보았다. 그동안 조나는 놈팡이에서 남자로 진화했다. 검은 머리는 빗지 않은 듯했지만, 사실은 그 효과를 노린 세심한 빗질의 결과였다. 레이시가 앞장서서 그쪽 무리로 향했다. 타냐 로스가 먼저 몸을 돌렸다.
“안녕, 레이시.” 타냐가 냉랭하게 말했다. (중략)

 

레이시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이윽고 레이시가 길고 느리게 중얼거렸다. “안녕…….” 나는 레이시가 당황하는 걸 이때 처음 보았다. 정신이 들자 레이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화를 못했지? 그동안 외국에 나가 있었어.” 웃기는 변명이었다. 고층건물 위에서 뒷걸음질 치다가 무심코 사람을 창밖으로 떨어뜨려놓고 아무도 못 봤기를 바라는 소리였다. 타냐는 레이시를 끼워줄 마음이 없었다. 레이시도 알고 있었다. 레이시는 상대를 링에 몰아붙이는 권투선수처럼 혼자 알아서 무리 속으로 밀고 들어갔다. 레이시는 그동안 내숭과 장난기가 고급스럽게 결합된 업타운 방식을 연마해 온 터라, 이렇게 무적의 성적 매력을 내세워 다짜고짜 달려드는 다운타운 방식을 써먹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레이시에게서 순간 바람이 일었다. 다음 순간 레이시가 별무리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그림, 돈, 그리고 음모

레이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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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도는 포르투나토의 팔에 이끌려 방을 돌면서 손님들을 소개받는 와중에도 별로 말이 없었다. 영어가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불편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모르핀에 취한 환자처럼 행복하게 웃는 것을 보니, 그 어색함이 사교상의 문제지 약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탤리는 에두아르도의 상태를 본 뒤, 누가 됐든 이날 밤 그에게 슬라이드를 제대로 보여주기는 글렀음을 알았다. 그는 그림 얘기는 다음날 에두아르도의 전담 큐레이터에게 전화해서 그때 본격화하기로 했다. 에두아르도의 큐레이터는 똑똑한 조정자에 불과하고, 최종 결정은 언제나 에두아르도가 맑고 예리한 정신 상태에서 내렸다. 다만 그럴 때가 드문 게 탈이었다.

 

 

 

                                         [위프레도 램,이니시에이션(Initiation)]

 
소개가 끝나자 사람들은 주인의 안내에 따라 집을 구경했다. 집은 그 자체로 미술 전시장이었다. 모든 것이 빈틈없고 정교했다. 전기 스위치 하나도 시대를 반영했고, 완벽하게 작동했다. 하늘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 천사가 내려와 구석구석 요술지팡이를 휘두른 것 같았다. 침실에는 멋들어진 나카시마 책장이 있고, 그 안에 미술 관련 장서가 알파벳순으로 놀랍고 흐뭇하게 정렬돼 있었다. 나카시마는 바닷가 기념품 가게에서나팔 것 같은 원목가구를 순수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가구 디자이너였는데, 긴 공백기 끝에 이즈음 재조명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 일등공신은 역시 플로레스였다. 침대 위는 쿠바 출신 초현실주의 화가 위프레도 램의 그림이 장식하고 있었다. 램은 일종의 피카소 아류지만, 큐비즘에 초현실주의를 접목한 독특한 화풍으로 찬사를 받았다.
“쿠바니즘.” 플로레스가 농을 날렸다. 보이는 것만큼 약에 절어 있는 상태는 아닌 듯했다.
“이런 것들을 대체 어디서 찾아냅니까?” 스털링이 물었다. 딱 탤리가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저게 어디서 났더라?” 에두아르도가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탤리의 마음속에 있는 다른 질문은 오직 스털링만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었다. ‘블랑카와 섹스하는 느낌은 어떨까.’ 탤리는 블랑카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램 그림은 보지 않고, 그녀의 드러난 목을 바라봤다.

(중략)

게일이 하는 짓은 아트 딜러보다 농구 수비수에 가까웠다. 그녀는 목표물을 철저히 마크해 탤리의 공이 그쪽으로 흐르는 것을 원천봉쇄했다. 하지만 탤리는 식사 후에 게일이 목표물을 훤히 노출시킨 채 화장실에 토하러 갈 것을 알고 그때를 노렸다. 예상대로 게일이 정확히 디저트 후에 자리를 떴다. 탤리는 당장 플로레스의 옆자리를 차고 앉았다. “현대미술로 방향을 잘 트셨습니다. 침대 옆에 파일럿 마우스 그림 슬라이드를 하나 놔뒀습니다. 가짜가 나돈다니까 조심하세요. 그건 진짭니다. 그리고 아까 램 그림말입니다, 파실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파실 의향이 있다면…….”
만찬은 모두가 인사불성이 된 후에야 끝났다. 탤리는 호텔까지 걸어갔다. 밤공기가 훈훈했다. 그는 취한 소리로 휘파람을 불었다.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손으로는 시내트라처럼 외투자락을 등 뒤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가 호텔방에 들어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림, 돈, 그리고 음모

레이시 이야기

스티브 마틴 지음. 이재경 옮김. 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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