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에도 계보가 있다면, 이 시대 시각미술은 차세대 유머를 미리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여전히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고 있을 때, 제프 쿤스는 25톤에 달하는 화분들로 높이 12미터짜리 강아지를 만들고,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유성에 맞아 자빠진 교황을 실물 크기로 만들었다. 카텔란은 교황상을 만든 다음해에는 갤러리 디렉터에게 남자 성기처럼 생긴 진홍색 코스튬을 입혀서 한 달 동안 갤러리 안을 돌아다니게 했다.

 

 

 

 

[ 마우리치오 카텔란, 「아홉 번째 시간」, 1999년]

 

레이시와 내가 갤러리를 떠나려 할 때였다. 입구가 떠들썩해지더니 새로운 무리가 들어와서 갤러리 가운데 있는 다른 무리 쪽으로 다가왔다. 순간 내 눈에는 두 은하가 서로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충돌 직전에 움직임이 멈췄고 두 무리는 하나로 합쳐졌다. 은하계 비유는 적절했다. 이 합체로 중심이 두 개인 은하계가 만들어졌다. 두 중심 모두 젊은 남자였다. 한 명은 전시회 작품들을 만든 아티스트였다. 하지만 정작 진짜 중심은 다른 남자였다. 레이시가 그쪽을 돌아봤다. 레이시가 그 무리에서 맨 먼저 알아본 사람은 여자였다. “젠장, 타냐 로스잖아.”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이번에는 좀 더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어라? 조나 마시네?” 레이시는 조나를 3년 만에 처음 보았다. 그동안 조나는 놈팡이에서 남자로 진화했다. 검은 머리는 빗지 않은 듯했지만, 사실은 그 효과를 노린 세심한 빗질의 결과였다. 레이시가 앞장서서 그쪽 무리로 향했다. 타냐 로스가 먼저 몸을 돌렸다.
“안녕, 레이시.” 타냐가 냉랭하게 말했다. (중략)

 

레이시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이윽고 레이시가 길고 느리게 중얼거렸다. “안녕…….” 나는 레이시가 당황하는 걸 이때 처음 보았다. 정신이 들자 레이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화를 못했지? 그동안 외국에 나가 있었어.” 웃기는 변명이었다. 고층건물 위에서 뒷걸음질 치다가 무심코 사람을 창밖으로 떨어뜨려놓고 아무도 못 봤기를 바라는 소리였다. 타냐는 레이시를 끼워줄 마음이 없었다. 레이시도 알고 있었다. 레이시는 상대를 링에 몰아붙이는 권투선수처럼 혼자 알아서 무리 속으로 밀고 들어갔다. 레이시는 그동안 내숭과 장난기가 고급스럽게 결합된 업타운 방식을 연마해 온 터라, 이렇게 무적의 성적 매력을 내세워 다짜고짜 달려드는 다운타운 방식을 써먹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레이시에게서 순간 바람이 일었다. 다음 순간 레이시가 별무리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그림, 돈, 그리고 음모

레이시 이야기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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