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 500톤의 철 구조물이 첼시 입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고시안 갤러리가 24번가에 새로운 전시 공간을 오픈했다. 새 갤러리를 오픈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았다. 래리 가고시안의 시기 세력은 은근히 고소해했다. 거기다 가고시안은 새 전시 공간에 설치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리처드 세라의 거대한 작품을 들이기로 했다. 그러자면 높이가 4미터에 육박하는 녹슨 코텐 강철판들을 옛날 페인트 공장 안에 세우고, 수개월 안에 옛날 페인트 공장을 번드르르한 갤러리로 탈바꿈시켜야 했다. 오프닝은 연기됐다. 괴물 같은 작품 운반에 필요한 크레인이 모두 그라운드제로의 잔해를 치우는 데 동원됐기 때문이다. 아트 쇼 같은 하찮은 일에 대절할 크레인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라의 거대한 강판들이 마침내 가고시안 갤러리 안에 균형을 잡았다. 모로 세운 종잇장처럼 늘어선 강판들 사이를 거니는 느낌은 놀라움 반, 무서움 반이었다.

 

 [리처드 세라,원환체와 구체의 사이, 2001년]


레이시는 자신의 2차 오프닝을 가고시안의 세라 기획전 일정에 맞췄다. 레이시는 라토냐 월시의 아슬아슬하고 알록달록한 그림들을 갤러리에 걸었다. 세라 기획전에 떼 지어 몰려드는 미술 애호가들로 첼시는 때 아닌 발동이 걸렸다. 세라 오프닝에서 흘러넘친 사람들로 레이시의 갤러리까지 북적였다. 그림들이 팔려나갔다. 이번에는 화가의 친지들이 아닌 진짜 수집가들에게 팔렸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소식과 사치스런 미술품 쇼핑이 동시에 거리를 활보했다. 누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멀리 있었다. 여기서는 평소대로 행동하면서 그런 무력충돌쯤 얼굴에 날아드는 파리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미술시장은 전례 없이 달아오를 태세였다. 미술계 관계자들과 지식층을 넘어서, 주식 투자가들과 금융계까지 첼시로 눈길을 돌리게 하는 엄청난 상승세가 시작되고 있었다.
레이시가 상상했던 오프닝이 바로 이런 오프닝이었다. 몇 개월 전 캐리 하든 기획전의 낭패는 이제 지난 일이 되었다. 레이시는 매력과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라토냐 역시 강렬한 외모를 자랑했다. 레이시는 라토냐의 지적인 면이 십분 드러나도록 도왔다. 그래서 라토냐가 수집가들의 눈뿐 아니라 뇌리에도 각인되도록 했다.
이번에는 파트리스 클레르도 왔다. 하지만 지인들과 어울려서 왔다. 그리고 캐리 하든도 왔다. 파트리스는 레이시와 캐리 사이의 비밀을 간파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아쉬웠다. 나는 이번 기회에 파트리스가 진실을 제대로 깨닫고, 그동안 묶여 있던 희망고문의 굴레를 벗어나기를 기대했다. 나는 레이시와 캐리의 하룻밤이 완전범죄로 넘어가는 것에 혼란을 느꼈다. 세상이 다 그런 걸까? 세상의 모든 배신이 이렇게 감쪽같이 덮어질 수 있나? 그렇다면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배신의 줄에 걸려 언제라도 재수 없이 자빠질 수 있다는 얘기였다.
파트리스는 레이시에게 나중에 술 한잔 하자는 말을 남기고 갤러리를 떠났다. 하지만 레이시는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고, 그도 레이시의 연락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을 마지막으로 파트리스와 레이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림, 돈 그리고 음모

레이시 이야기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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