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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시 한국사 - 아는 역사도 다시 보는 한국사 반전 야사
김재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2월
평점 :
온라인 신문 딴지일보의 역사연재로 엄청난 인기를 얻어 ‘업로드 기다리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라는 독자들 때문에 글에 도취되어 결국 『찌라시 한국사』를 출간하였다는 저자의 말에 빵 터져 읽기 시작했다. 허나 찌라시라 해서 저자가 역사를 가볍게 그리고 있거나 구어체라 하여 그저 일반적인 시각으로 그려진 역사책은 절대 아니다.
각 장의 소제목도 흔한 찌라시들의 헤드라인처럼 한 눈에 쏙쏙 들어오는 문구들이라 소제목만으로도 충분한 이해가 가능하다. 조선시대는 사료가 충분하여 어느 정도 작가의 상상력보다는 실록이나 자료를 참고한 흔적들이 보이지만 고대시대는 작가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가장 빛나는 장들이라 여겨진다. 균형외교의 달인이면서도 이름처럼 가장 오래 살았던 장수왕은 균형외교의 달인으로서의 탁월한 면모를 보인다. 재밌는 건 그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너무 오래 살아서 왕이 되지 못한 아들 조다는 훗날 ‘쪼다’라는 말을 낳았다는데 여기까지는 찌라시 한국사니까 애교로 이해가 된다. 두 번째로 기억나는 이야기는 이자겸이었다. 그의 관직명이 ‘양절익명공신 중서령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라는 것도 처음 들었는데 자신에게 내린 셀프 관직명만 봐도 그가 얼마나 자기 권력에 도취되어 있었던 인물이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역사공부를 할 때 ‘이자겸의 난’은 왕이 되고 싶은 문벌귀족의 반란?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책으로 다시 재해석되는 이자겸의 난은 권력에 대한 한 인간의 집착이 얼마나 큰 어리석음인지를 떠올려보게 되는 장이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자겸 같은 인간이 바닷가 모래알 수보다 많은 것 같으니, 모두 이자겸처럼 굴비만 먹고 사는 것 아닌지.
이자겸이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척준경에게 제압되어, 영광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었어. 일성에 의하면 영광으로 귀양 간 이자겸은 산란 직전의 조기를 잡아 소금으로 간을 하여 말린 굴비를 인종에게 진상했다고 해. 이건 왕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음식을 진상한 것이 아니었어.
소금에 절인 음식이라 맛이 변하지 않듯이 왕권에 대한 나의 의지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진상 짓’이었다고 해.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고 하는 의미로 ’비굴‘의 앞뒤를 바꾸어 ’굴비‘라고 이때부터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지. 어쨌든 이자겸은 귀양 생활 1년 만에 사망했는데, 굴비 과다 복용의 부작용인가? 역시 짠 음식은 장수에 치명적이야. -p132
가짜 뉴스가 판치고 있는 시대이기에 찌라시는 치명적인 편향성을 지니고 대중을 선동한다. 찌라시가 거짓이 될 때는 가차 없이 폐기처분되지만 찌라시가 진실을 말할 때는 일상의 미덕으로 자리매김한다. 역사에 스토리텔링을 첨가하니 재미있을 뿐아니라 유익하고 교훈도 주는 한국사가 되었다. 일상의 관점으로 새롭게 재조명되는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나름 역사해석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도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기존에 우리가 배워 온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 하여 승자의 관점에서만 재단된 주입식 한국사였다. 역사를 기록한 시대와 관점에 따라 부정과 정당성에 오류가 있을 수 있기에 한국사를 승자의 관점이 아닌 인간적인 관점에서 재조명 되는 작업이 요원해 보인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역사 속에서 악녀로 평가되는 천추태후에 대해서도 정말 악녀였을까 아니면 당찬 여장부였을까를 재조명해보고 삼벌초는 권력의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한 것인지 백성의 충신이었는지를. 폭군 연산군보다도 그 뒤에 서서 그를 조종하는 희대의 간신 임사홍과는 반대로 반정공신으로 충신이었으나 다시 반군이 되어 왕을 죽여야만 했던 이괄의 사연을 통해서 보듯 역사책에서 미처 조명되지 않았던 부분을 인간에 대한 관점으로 서술하는 저자의 썰은 페이크가 될 수 없는 진실의 미덕을 보인다.
“이 지랄 맞은 세상, 우리 백성들은 언제쯤 허리 펴고 살 수 있을까나? 한 500년 지나면 우리 손자의 손자들은 맘 편히 살겄지?”
천만에, 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백성들은 허리 펴고 살지 못하고 있으니, 오래된 미래를 저질스럽지 않은 역사로 바꾸기 위해서는 역사의 마중물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