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연습 - 김승옥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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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은 ‘60년대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작가다. 1964,서울로 현대문학을 공부했던 나로서는 무척 익숙하기도 하면서 현대문학의 굵은 획을 그었던 거장의 소설을 읽는 감회는 감격 그 자체였다. 김승옥 전집이 출간되자마자 구매해 놓고는 시간의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다가 다시 꺼내보기 시작한 건 무진의 명물이라던  안개때문이었다. 매일 아침 내가 만나는 안개가 보여주던 관념의 세상, 그 관념의 색이 분명해질수록 김승옥이라는 작가의 소설들이 머릿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그가 그리는 신산한 삶의 풍경속에는 내 유년기와 중첩되는 배경이 있다. 

 

 격동의 현대사가 온몸을 관통하던 시대의 배경이란, 늘 그렇듯 파편화되어 가는 서민들의 애닮은 삶이 주재료다. 사변 이후, 이데올로기가 휩쓸고 지나간 소도시의 살풍경을 그려낸 건()과 같은 소설은 어린소년이 바라보는 세상이다. 6.25가 끝나고 빨치산들의 공격으로 폭격을 맞은 소도시에  대비되는 천진난만한 소년의 시선에는  병원건물에 불이나고 빨치산의 시체를 발견하는 일이 그저 학교친구들과  재미있는 이야기꺼리가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천연덕스러운 생의 농담인가. 또 거기에 등장하는 어느 동네나 다 있던 동네이쁜언니 윤희언니 등장은 시대를 관통하는 불안함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소년의 형, 무리들이 강간을 모의하는 것으로 짓밟혀질 예정이다. 소년에게 일본으로 피난 간 짝사랑 미영이를 연상케하던 꽃처럼 이뻤던 동네누나는 그렇게 불행을 예고한다. 사회 전반의 우울함과 암울함이 곳곳에에서 숨을 쉬던 시대였던 것이다. 

편모슬하에 자란 세 남매이야기  생명연습은 여수까지 피난한 후, 생선장수를 시작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찍 여읜 아버지의 모습을  닮은 어머니의 애인들, 야간학교를 다니는 누나와 폐가 나빠 다락방에서 은거중인 형과 주인공은 어느 날, 어머니를 죽이기로 한다. 물론 누나와 주인공은 가담하지 않지만 다락방에서 점점 괴물이 되가던 형은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월부책장사를 하던 남자가 아내가 죽고 나서 가난 때문에 시체를 병원에 팔고 자살을 시도하는 『서울,1964』,  바닷가 촌마을에서 도시로 돈 벌러 간 누이의 눈물『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  검열에 걸려 직업을 잃게 된 만화가가 세들어 사는 다세대주택의 미싱소리와 함께 1970년이 병풍처럼 그려진다. 새벽시장에서 꽃을 팔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누운 며느리대신 무허가로 염소탕을 팔던 시어머니는 경찰단속반에 걸린다. 처음 마주하게 된 경찰관의 서슬퍼른 눈동자는 누나에게 향하고, 그 날 이후 누나는 꽃대신 버스안내양이 된다. 소년과 할머니는 누나의 버스가 지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른다. 『염소는 힘이세다』  제주도 비행기 안에서 첫눈에 반한 여인, 결혼까지 성공하지만 나중에야 그 예쁜 아내가 호스티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울의 달빛0章』은 1977년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현대사의 광풍속에서도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던 서민들의 삶의 파편이 곳곳에 스며들어 시절의 배경들을 연상케 한다.  월남전 파병, 유신체제 발동으로 격변하던 시대와 경제성장이라는 미명하에 무너져가던 전통윤리를 그리며 자본주의의 급격한 흡수로 물질만능주의가 틈새를 파고드는 찰나의 순간들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비극적인 붕괴가 시작되던 시대의 피해자로서의 서민들의  단편들이 획기적이고도 충격적이며 기발하다. 한을 품은 여귀가 내뿜는 입김과 같은 안개, 그 안개 너머로 보는 세상은 현대화라는 기차를 타고 가족과 사회와 공동체를 빠르게 해체해 갔다. 무진기행이 담아내는 도시는 그래서 몽환적이다. 잡으려 하지만 잡히지 않고 보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안개같은 세상, 그것이 바로 현대라는 이름의 세상인 것이다. 김승옥의 소설은 그 세상의 치밀한 엿보기다. 파편화된 사회를 조각조각 이어주며 치열한 생의 고민이 이 소설들 안에 담겨 있었다.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이 한마디로 얼마나 기막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과정 속에는 번득이는 철편이 있고 눈뜰 수 없는 현기증이 있고 끈덕진 살의가 있고 그리고 마음을 쥐어짜는 회오悔悟와 사랑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봄바람처럼 모호한 표현이 아니냐고 할 것이나 나로서는 그이상 자세히는 모르겠다. -<생명연습> 중에서

 

불륜이 비어홀처럼 만연해지며 신종 오락처럼 그 유행을 시작한 1970년대는 마치 낚시꾼이 찌를 노려보듯 사회현상의 변화를 주목하고 있는 소설가에게는 소설 소재의 황금어장이었다. 전통윤리 또는 절대가치가 붕괴되는 시대에는 모럴리스트들이 할말이 많아지는 법이다.-작가의 말 중에서

 

미안해요, 어머니, 라고 누이는 말하고 싶었던 거다. 하루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무서운 사건이 세계의 은밀한 곳에서 벌어지고 그리고 다음날은 희생자들이 작은 조각에 몸을 기대고 자기들의 괴로움을 울며 부유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뭐냐, 인간이라? 저 도시가 침범해오지 않는 한, 우리는 한 고장을 지키기에 충분한 만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영원의 토대를 만든다는 것, 의지의 신화들을 배운다는 것, 우는 법을 배운다는 것, 침묵을 배운다는 것, 그것만이 인간인 것이냐? 인간의 허영이 아닌가, 라고 나는 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질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을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무진기행

 

오래 전에 읽었던 무진기행을 다시 손에 들었다. 새벽에 산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나를 먼저 반겨주는 건 산이 아니라 자욱한 안개였다. 그때마다 무진기행이 떠올렸다.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이라던 그 안개가 나를 감싸고 나는 그 여귀가 삼켜지도록 보내온 먹잇감처럼 빨려 들어가곤 했다. 안개를 통과하여 걸어가던 그 몽환의 새벽길에는 그리움의 계단이 하늘까지 닿아있다. 나는 늘 그 계단을 올랐다.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주인공이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로 무진을 떠올르듯이 그 새벽의 안개는 내게도 추억을 소환하는 마술을 보여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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