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천명관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9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만으로는 바닷가에서 사투를 벌일 것만 같은 남성중심의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제목처럼 의아했던 것은 주인공의 이름이 봄처럼 화사한 어여쁜 이름인 '춘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래처럼 거대한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 거대한 여자는 '붉은 벽돌 여왕'이라 불리웠는데 천명관은 소설에서 직접 들려주는 화자로 등장한다. 환상적 리얼리즘 문학과 비슷한 전개로 구라의 솜씨가 마누엘 푸익과 모옌, 살만 루슈디의 뺨을 여러 번 칠 정도로 쎄다. (평소 구라가 가장 쎄다 생각해왔던 작가들이다.) 환상적 리얼리즘의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않고 고래라고 할 것 같다.

 

금복

길 가던 사내라면 누구나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어떤 냄새를 풍기는 금복이 산속 깊은 마을을 도망치듯 빠져 나온 이유도 금복의 냄새에 미쳐버린 홀아버지의 어긋난 욕정을 피해서였다. 도망치듯 생선장수를 따라 바닷가 마을에 도착하여, 생전 처음 본 고래의 크고 거대한 모습에 매료되는데 이때가 바로 그녀의 신산한 삶을 예고하는 순간이다.

 

그때부터 그녀를 충동질하고 아무 때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게 만드는 그 수상한 바람은, 크고 넓은 것에 무턱으로 매료되는 습관과 더불어 평생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게 되었다.-p60

 

나이 많은 생선장수와 살다가 거대한 몸집을 가진 걱정을 본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고래를 사랑한 금복에게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육체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단순함의 비극으로 인해 걱정의 육체는 주저앉았고, 걱정의 병수발로 금복은 지쳐만 갔다. 그런 금복을 눈여겨 보았던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두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칼자국’은 하양 양복을 빼입고 영화를 보여준다. 아무리 금복이 바람끼가 다분하다하여도 '크고 넓은' 걱정을 사랑한 것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이후 걱정의 약값과 금복의 존웨인과 칼잡이의 욕망으로 한 집에 동거를 시작하게 된  것 역시도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다. 걱정은 금복에게 '고래'라는 욕망 그 자체였기에 칼자국을 위해서 걱정을 포기되는 남자가 아니었다. 이들의 동거는 걱정의 몸무게가 오백 킬로가 넘을 때까지 평화로왔다. 적어도 폭풍우 치는 밤,  금복과 칼잡이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이 바닷가에 투신하고 ,  걱정을 칼잡이가 죽인 걸로 오해한 금복이 작살로 칼잡이의 배를 관통할 때까지 행복했던 나날이었다. 

 

이후 금복은 바닷가 마을을 떠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걱정과 칼잡이의 망자가 금복을 찾아와 떠돌이 거지로 유랑을 다닌 덕에 목숨을 부지한 금복이 어느 허름한 코끼리가 사는 헛간에서 아이를 낳았다. 쌍둥이 자매의 마구간에 말처럼 키우는 코끼리가 있는 곳이었다. 쌍둥이 자매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게 되자 인적 없는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다.금복의 인생 2막이 열리는 공간인  평대이다.

 

노파

여기서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먼먼 옛날의 노파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복이 일곱 살에 이미 백키로가 넘은 딸 춘희를 데리고 시작한 국밥집의 오랜 주인이자, 삶의 업보이며, 고래의 꿈을 이루어주는 장본인이 바로 '노파'이기 때문이다. 노파는 고래와는 또다른 리비도의 형태이며, 금복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원혼이다. 노파의 이야기는 이렇다.

 

 얼굴이 박색인 노파는 부엌데기를 전전하다 평대에 들어와 국밥집을 하기 시작했는데, 노파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다. 딸은 대갓집 종살이를 할 때 돌보던 반편의 여식으로 반편은 걱정처럼 거대했고, 거대한 남근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도 워낙 박색이라 남자를 알지 못했던 그녀가 어린 반편이와 정을 통한 것이 들통이 나자 모질게 매맞은 채 대문 앞에 버려진다. 이후 세상을 향해 복수를 다짐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한편 딸에게는 정말 나쁜 엄마였다. 반편이를 빼닮았다는 이유로 눈 하나를 찔러 애꾸로 만들고 자신과 운우의 정을 나누던 곰보가 딸을 간음하자 벌치기에게 벌 두통에 딸을 판다. 돈에 악착같이 집착하며 살지만, 어느 겨울날 집앞 빙판에 미끄러진 후 두 번 다시 일어나질 못한다. 냉방에서 굶어가며 똥오줌에 범벅댄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노파를 찾아 온 손님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 있는 핏줄이었던 반편의 딸이었다. 그러나, 애꾸딸은 노파가 악착같이 모은 돈을 찾을 뿐 아픈 어머니에게는 관심도 없다. 돈을 찾다찾다 못찾은 애꾸딸은 몸싸움을 하다 노파를 벽에 밀치고, 질기고 질겼던 그녀의 일생은 뇌진탕으로 마감된다. 평생을 돈만 벌었던 그녀의 돈은 어디에 있을까.

 

이야기는 다시 금복의 국밥집으로 돌아온다. 노파의 돈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금복의 머리위로 쏟아졌다. 평생 돈에만 집착하면서 악착같이 모은 그 돈은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물을 머금은 채 금복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고 금복은 그 돈으로 벽돌공장과 찻집에 이어 다방과 운수업, 이어 고래극장까지 오픈하며 세속에서 누릴 수 있는 성공을 연타석 홈런으로 쏘아 올린다. 게다가 금복은 평생의 숙원이었던 '고래'가 되어 있었다. 노파의 욕망이 돈으로 향해 있던 것처럼 금복의 욕망은 남자였다. 남근에 대한 원초적인 동경이 내재화된 결정체는 바로 그녀 자신이 고래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춘희

그럼 그녀가 낳은 딸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곱 살에 이미 백 킬로그램이 넘은 딸 춘희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걱정의 죽음이후 4년이라는 터울이 있음에도 걱정을 빼닮아 금복은 춘희를 더욱 미워했다. 금복은 마치 노파가 환생한 것처럼 노파의 삶을 그대로 답습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금복에게는 남자를 홀리는 '어떤 냄새'가 있었고, 노파는 '반편'이나 짝이 될 정도로 박색이었다는 것이다. 노파가 오로지 '세상을 향해 복수할 것'이라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며 살았듯이 금복은 이재가 밝았다. 노파의 유언처럼 금복이 만났던 남자들은 모두 불행해졌고, 춘희는 엄마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로 자라났다. 그나마 금복의 인생에서 가장 바르고 충직한 남자 이 춘희의 남다른 재능과 감각을 눈치챈 후, 벽돌 굽는 법을 알려주었기에 망정이지 文이 아니었으면 춘희는 이 땅에 왔다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존재였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로 반복 되는 지면은 그녀가 세상에서 한 유일한 행위이자 유산이 '벽돌'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금복의 고래는 춘희를 낳았고, 춘희는 벽돌을 낳았을 뿐, 삶은 이처럼 덧없는 것이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 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설화적 상상력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 고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고래는 설화적 상상력에 근거한다. 이야기가 구비 전승되어 대대손손 내려오면서 상상력을 더하여 허구화가 극대화 되면서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지만 존재할 거라 믿는 현실세계와 상상세계 경계에 있는 형상이 바로 고래이다. 그럼 이 책 고래는 어떤 존재일까?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금복이 고래에 자신을 투영하여 내재화라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리비도. 즉  '남근'이다. 남성의 생명력(남근)에 대한 원초적 동경은 오랜 설화와 민요에서 등장하는 소재로 인류의 근원적인 욕망을 뜻한다. 마치 오래 전부터 구전되는 산문을 재구성한 느낌처럼 설화와 같은 친화력이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노파, 금복, 춘희 이  세 명이 그리는 신산스러운 삶의 무늬, 그것은 여성이라는 무늬였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춘희처럼 화사하지만 이들의 삶은 거대한 몸을 지닌 춘희처럼 무겁기만 하다.  우리가 아무리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 해도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곳에 있다. ('춘희의 고독은 그녀의 생애 전체가 그랬던 것처럼 누구에게도 제대로 전달되거나 결코 이해될 리 없는 성질의 것이다.') 금복이 삶이 그러하고, 노파의 삶이 그러하다. 닥쳐오는 삶에 운명적으로 반응하고 그저 순응할 뿐이다. 그냥 살아지는 것,  어쩌면 여성의 삶은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