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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획의 철학 - 미루는 본성을 부정하지 않고 필요한 일만 룰루랄라 제때 해내기 위한 조언
카트린 파시히.사샤 로보 지음, 배명자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언제부터인가 바쁘다 바빠를 입에 달고 산다. 주부가 다 그렇듯 뒤돌아서면 온통 일이다. 빨래를 돌리며 청소기를 돌리는 것은 예사고 잠시라도 책이라도 읽고 나면 어느새 쌓여있는 설거지와
빨래더미들이 나의 여유로움을 비웃듯 쌓여있다. 이런 일은 사무실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조금이라도 꾀부리고 나면 서류더미들 사이로 정리하지 못한 계획서들이 삐쭉삐쭉 고개를 내밀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럴 때면 언제나 피로가 자책감을 함께 몰고 온다. 속도전에 익숙해진 현대생활에서 무계획과 나태는 부정적이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무계획을 찬양하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의 공저자 카트린 파시히와 사샤 로보는 웹블로그 ‘리젠마쉬네’ 의 편집자이자 프로그래머이다. 이들이 《무계획의 철학》을 집필한 이유는 일중독에 빠진 일벌레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게으름뱅이 사이의 격렬한 전장에 내던져진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함임을 서문에 밝히고 있다.
미루는 습관이 있고 계획 처리에 서툰 사람을 책에서는 LOBO[Life style of Bad Organization ] 라 한다. 저자들은 LOBO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하며 더 세심하게 스케쥴을 계획하고 관리하며 더 열심히 일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은 헛된 노력이라 지적한다. 그보다는 자신의 능력이나 취향에 맞지 않게 너무 많은 일과 계획을 처리하며 완벽함의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먼저 살펴보라 한다. 할 일을 미룬 후 자책감의 악순환은 현재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의 자책감,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LOBO들이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일은 다른 곳에 있다. LOBO들 스스로가 자기 능력에 맞는 환경을 찾거나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어떤 일을 해내지 못했거나 원하는 수준으로 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자각할 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살다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P55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겪게 되는 자책의 뿌리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 츠빙글리의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로 ‘행복주의와 쾌락주의를 모두 무시하고 노동을 목적 그 자체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의 행복과 효용의 관점에서 볼 때 전반적으로 초월적이면서 완전히 비합리적인’ 사고가 자리잡게 되면서 끊임없는 노동압박감이 불필요한 자책과 강박관념을 가져왔다고 한다.
따라서, 저자들은 일을 완벽하게 하지 못했을 때도 자책감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그보다 더 우선적으로는
스스로 선택한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큰 자제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목표 달성은 물론이며 일을 미루는 일도 없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효율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자신의 무의식(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어떤 일을 먼저 할지 선택할 때는 내적 감탄(영혼의 소리)을 지표로 삼아야 한다, 서류 분류, 지하실 청소, 다림질, 양말 정리등이 딴청거리로 사랑받는 까닭은 중요도나 만족감 때문이 아니라 단시 양심을 달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노련하게 미루는 프로들은 종종 훌륭한 업적을 남긴다. 리누스 토발즈는 컴퓨터 운영체제 리눅스를 개발하느라 전산학과를 졸업하는 데 8년이나 걸렸다, 로베르트 슈만은 전공인 법학 공부는 하지 않고 피아노만 쳤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궁정 화가로서 맡은 업무를 제때 끝내지 못했다, 기하학이 훨씬 더 흥미로왔기 때문이다.
“일과 한눈팔기 사이의 이런 가깝지만 모호한 관계가 최적의 순간을 찾거나 끌어당기는 또 다른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달콤한 독인 한눈팔기의 양을 적절히 조절하고 배분하는 것이다.”
“즐거운 한눈팔기를 먼저 해서 머리에 활기를 불어넣어라.”
지연행동과 싸울 때는 게으름의 힘이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집중을 방해하는 충동적 행위를 할 수 없도록 환경적으로는 인위적으로는 장치를 마련해두면 충동에 즉각 반응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사실 나도 매일 스케쥴을 짜고 계획표대로 생활하려 애쓰느라 지쳐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시간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마치 영화 <플랜맨>에서 시간과 초를 세분화하여 모든 것을 계획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강박증상을 보이는 정재영이 되어버린 기분이였다. 그런 정재영 앞에 나타난 자유분방할 뿐아니라 무계획적인 여인 한지민을 만나게 되면서 플랜맨은 처음으로 무계획의 즐거움을 깨달아 가게 된다. 책에서 말하였듯 세상은 무계획이 만들어낸 산물들로 넘쳐났고, 일례로 모나리자의 그림은 미완이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기에 유명해진 것이다. 포겔은 실수로 엉뚱한 전철역에 내리는 바람에 전장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이처럼 공저자들은 무계획이 가져오는 삶의 행복과 즐거움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를 맛보게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즐겁다면 미루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고, 관료주의에 물들거나 계획이라는 틀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가게 되기 보다는 조금은 일을 미루더라도 자책감을 가지지 않으면서 무계획의 철학을 누릴 수만 있다면, 플랜맨의 정재영처럼 변신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참에 마음 한켠에 짐처럼 남겨졌던 계획들을 잠시 내려놓고 무계획의 즐거움을 실천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