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긴장으로 몰아넣었던 준전시체제가 남북의 극적인 대화타결로 해제 되었다. 얼마간은 평화로운 국면을 맞이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 분단국가라는 현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번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인해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가본 결과 전쟁에 대한 경각심이 새롭게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던 2030세대들이 투철한 안보의식을 보여주면서 젊은이들의 의식수준이 생각보다 높은 수준이라는 점도 상당히 고무적인 면모였다. 이런 상황들에서 이 책과 함께 전쟁에 대해서 조금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가져보게 되었고 나름 이성적으로 전쟁을 판단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었다.
동양에 《손자병법》이 있다면 서양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있다. 손자병법이 현대에 처세술로 읽히고 있지만 클라우제비츠는 말그대로 ‘전쟁’이야기다. 오로지 싸움에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이지, 인간관계에서 통용되는 전략과전술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현대에도 꾸준히 읽히는 것은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어 인간관계와 인간행위의 폭력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우리는 싸움으로 점철된 삶을 산다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왜 우리는 싸우는가? 싸울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이겨야 하는가? 모든 사람이 승리를 위해 노력한다면,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는가? 손자와 클라우제비츠는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진진하게 찾고, 이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두 책은 동서고금의 전서들 중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고대의 전국시대와 근대의 나폴레옹 전쟁으로부터 얻은 인식과 통찰을 담고 있는 이 책들은 전략과 전술의 기본서 뿐만 아니라 전쟁의 근본원리에 관한 포괄적인 철학서다.
클라우제비츠는 격변과 대변동의 시기에 프로이센에서 태어났다. 그가 군대에 입대할 당시에는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대국으로 도약하던 시기였고 프랑스 나폴레옹과 대치되는 상황이었다. 열두 살에 입대하며 프랑스와 전쟁을 경험한 후 그는 프랑스에 관하여 광범위한 공부를 독학하게 되는데, 여러 번의 전쟁 끝에 결국 프랑스의 포로로 수용생활을 하게 된다. 일년 후 귀국한 클라우제비츠는 프랑스 대혁명을 겪으며 깨달았던 전략을 바탕으로 군대 개혁을 꿰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그의 제안을 거부한다. 게다가 프랑스에 굴복한 프로이센은 나폴레옹(프랑스)를 위해 러시아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을 떠나 러시아로 망명하여 나폴레옹을 상대로 싸운다.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패했다. 이후 클라우제비츠는 러시아군에서 활동하다 십여년이 흐른 뒤 프로이센 군으로 복귀하고 워털루 전투에 참모장으로 참여, 나폴레옹 군대의 병력 증강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의 자유주의적 사상과 개혁적인 면모는 고국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직에서 만족해야 했는데 그때 지은 저술이 바로 이 책 《전쟁론》이다. 그의 전쟁론은 단순히 이론적 산물이 아닌, 수많은 전쟁을 경험하면서 통찰하게 된 사고의 유연성과 탄력성이 바탕이 된 전략적 사고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가치있는 책이다.
내가 죽기 전에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는 순간을 보게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번 전쟁위기의 순간을 체험하면서 느낀 건 전쟁을 감성으로 접근하여 판단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이 전쟁을 논할 때 평화통일과 무력통일이라는 관점으로 갈라지는데 ,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의하면 우리가 전쟁을 판단할 때 전쟁의 본질에 대하여 오류를 범하면 안된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럼 전쟁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폭력성이다. 우리가 전쟁하면 떠올리는 참혹함, 잔인함, 야만적인 행위들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전쟁의 본질을 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평화주의자들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위해서라도 무력을 사용하면 안된다고 주장하지만 클라우제비츠는 그러한 시각자체가 전쟁의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라 한다. 그가 말하는 전쟁은 엄연한 폭력 행위이며 폭력의 사용은 무제한적이며 , 적의 무장해제가 곧 전쟁의 목표이자 살아 있는 세력과의 전면전이다. 비폭력, 절대적 무저항 상태는 절대 전쟁이라 할 수 없으며 전쟁은 언제나 살아 있는 두 세력간의 충돌이기에 감성에 의해 전쟁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손자의 《손자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가르친다면, 클라우제비츠는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는 전략서이다. 손자와 클라우제비츠,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정치와 결합시키는데, 손자에겐 정치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또 하나의 정치의 연장선이라 보았고, 전쟁의 폭력성을 간과하는 오류가 전쟁에서 지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한다. 전쟁에 대한 사유,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에 사는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철학서가 아닌가 한다. 우리의 현실이 곧 전쟁이기에.
인도주의자들은 지나치게 많은 부상자를 내지 않으면서 인위적으로 적의 무장을 해제하거나 적을 타도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전쟁술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린다고 해도 이런 오류는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p37
상호 경쟁하는 두 집단 사이의 무력 충돌, 이것이 전쟁이다.-P43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이다.
정치는 단지 다른 수단으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다시말해 강한 감성은 쉽게 흥분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강렬한 마음의 동요에도 불구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강한 감성은 가슴 속에 휘몰아치는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통찰력과 확신을 심어준다. 이는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폭풍우로 흔들리는 배를 정확하게 항해 할 수 있게 해주는 것과 같다.-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