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마라-출애굽기 23장 2절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던 해는 1894년으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가장 민감한 시대였다. 사건의 개요는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간첩으로 체포되는 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프랑스혁명과도 같은 자유와 정의의 승리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군에 대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드레퓌스는 동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 못되었다. 드레퓌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료들이 방관한 것은 드레퓌스의 그러한 성격에서도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드레퓌스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드레퓌스가 장교가 되었을 때 창간한 드뤼몽의 [라 리브르 파롤]지는 그야말로 프랑스인들의 '반유대주의 '감정을 부추기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지금도 언론은 선동의 선봉장에 있지만 당시 [라 리브르 파롤]지가 반유대주의의 앞잡이 역할을 하지 않았더라면 드레퓌스사건은 정치적문제로 비화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프랑스혁명이후 반세기를 지나오며 프랑스인들의 의식을 지배해온 정신적 기조는 ‘만인은 권리 앞에 평등하다’ 는 민주주의의 신조였다. 하지만, '반유대주의'라는 감정이 스며들게 되자 이들은 집단히스테리에 빠져 인권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집단이 되어 버린 국가의 국민에게 개인의 권리는 절대 중요하지 않다.
반유대주의 잡지[라 리브지 파롤] 지가 내세운 첫 번째 캠페인은 군내 유대인 장교들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 전술학교에는 드레퓌스 외에 또 한 명의 유대인 장교가 교육을 받고 있었고, 이 둘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성적을 받는다. 이에 드레퓌스는 군부에 항의하고 결정적으로 장교들의 미움을 받게 된다. 게다가 [라 리브로 파롤]지는 유대인들이야말로 외부의 적과 손을 잡고 프랑스를 멸망시키기 위해 준동하고 있는 내부의 적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 드레퓌스가 수습참모로 부속되자 군장교들은 핵심부서에 유대인이 한 명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장교들은 독일과 내통한 이중첩자로 드레퓌스를 지목하고 진위여부와는 상관없이 드레퓌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이중첩자로 체포되고, 뒤파티와 메르시에,부아데브르 장군과 진범(원래 간첩)이었던 에스테라지는 그를 이중첩자로 만들기 위해 날조를 시작했다.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 군을 상대로 드레퓌스의 결백을 주장하며 꾸준히 재심을 요청하고 있는 가족들과 어떤 억압에도 자신의 신념을 믿었던 클레망스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는 유죄를 판결받고 남아메리카에 종신유폐 된다. 그러던 중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고 갔던 명세표를 쓴 사람이 에스테라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사건을 은폐하려는 군을 상대로 진상규명을 요구하게 되며 다시 재판에 회부되는데 , 에스테라지의 자백이 있었음에도 군부와 프랑스는 드레퓌스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군중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하여 드레퓌스의 죽음만이 애국이라는 극단적 움직임까지 보인다. 이들 국가주의자들은 군의 신뢰가 무너지는 것(드레퓌스가 무죄라는 것)은 독일의 힘을 인정하는 정치적 분위기로 매도되어 드레퓌스의 결백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드레퓌스의 재판과 관련하여 '반유대주의'의 추악한 행동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또 하나 있었다. 이미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던 에밀 졸라는 자신의 전 명예를 걸고 '나는 고발한다'라는 호소문을 발표한다. 이 글은 전세계에 퍼저 에밀 졸라의 표어로 남는 역사적인 글로서 당시 군부와 군중들의 집단 히스테리를 명백히 분석하고도 남는 글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 프랑스 국민들은 비난의 칼을 세우고 결국 에밀 졸라는 유죄 판결을 받는다.
졸라를 위시하여 자유주의파 지식인들은 '드레퓌스파'에 대거 참여하며 정의와 진실을 촉구하였고, 반대로 반유대주의자들은 국가의 신념을 내세우며 이들과 팽팽히 대립하게 된다. 드레퓌스파는 무고한 시민에게 가해진 법의 불공정함과 정의의 신념이었지만, 반유대주의자들은 프랑스라는 국가의 비뚤어진 신념으로 이성을 마비시켰다는 점에서 이 둘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한쪽에서는 정의를 위한 자유투쟁이었기에 격렬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유대인이 독일, 영국, 미국과 짜고 프랑스를 분열시키려 한다는 음모론으로 치열했다.
가장 하릴것없는 사람의 권리라 해도 그 권리의 침해는 억업받는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에 위험을 부르게 된다. 인권이란 대의는 불가분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양자택일 할 수밖에 없다.-p235
드레퓌스 사건은 12년 만에 종결된다. 물론 자유와 정의의 승리였다. 에밀 졸라도 런던으로 망명한지 십 년만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드레퓌스 사건을 보면서 감성적 집단주의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새삼 되새겨보며 극단으로 치닫는 사고는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킨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일컬어 '디지털 마오이즘'이라는 IT용어가 있다. 과거 중국의 마오이즘이나, 독일의 나치즘과 비슷한 집단주의를 말하는데 요즘 인터넷 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다. 극단적인 좌파와 우파의 대립, 극우의 일베문화, 자신과 다르면 무조건 배척하고 보는 현실의 정치문화에서 드레퓌스 사건은 따끔한 경종을 울려주는 듯하다.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했고, 국가의 권리 이전에 개인의 권리가 먼저라는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의 전문은 나를 감동으로 전율케 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계보는 에밀 졸라로 이어져 내려왔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일 한 인간의 권리가 부정되면 곧 전 국민의 권리가 위태롭게 될 거라고 주장했다. 국가는 모든 시민이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게끔 보호하는 파수꾼이며,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일 수가 없다. -P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