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 유하 산문집, 개정증보판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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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볼 때 무한공감을 느끼는 책이 있다. 그 공감의 의미는 내 경험과 비추었을 때, 뇌리에서 늘 머뭇거리다가 떠나갔던 이미지를 행간에서 발견하게 되었을 때 커져만 간다. 유하의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는 다른 책과 달리 정말 오래 두고두고 읽었다. 이 책은 70년대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온 이들의 무한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말죽거리 잔혹사의 유하 감독의 산문집으로 저자는 자신을 가리켜 키치 소비자라 한다. 키치라는 정의는 방대하지만 가장 쉽게 풀이하자면 고급문화를 값싸게 대량으로 모방해낸 문화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대중과 친밀한 예술장르의 총체적 의미를 말하는 키치는 한 세대를 풍미했던 또는 현 자본주의 사회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의 문화 산업의 포괄적 개념이기도 하다.

 

저자는 키치 소비자 답게 70년대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지나오면서 함께 했던 대중문화를 통해 70년대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계몽사의 세계명작 동화와 만화책, 흑백 티비, 동시상영관 그리고 세운상가, 욕망의 찌꺼기와 페기물로 붐비는 쓰레기통 같은 압구정동 문화를 저자는 갑자기 쏟아져 나온 대중문화에 비판적이지도 못한 채 그렇다고 지금의 신세대들처럼 영혼과 육체가 완벽하게 대중문화와 합일되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로 흘려보냈던 70년대의 감수성을 추억해 낸다.

 

추억은 희미한아련함이다. 그 희미함에 나의 그리움을 보태다 보면 기억은 윤색되고 각색되어 가면서 나만의 액체성 풍경이 된다. 세월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있는 추억이라는 이미지는 고정된 풍경이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변화는 유동하는 풍경이다. 그 추억에 반추되는 현재의 나는 언제나 그리움으로 달음박질하는 그 순간들을 끌어 안으며 살아간다. 그랬다. 나는 언제나 그리움이 달음박질 하는 의식의 편린으로 이 시절을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눈 오는 날 명동 성당 앞을 가득 메웠던 시위현장과 홍대앞에서 매일 젊음을 불사르기 위해 분기탱천하였던 방황의 기억들과 올림픽이 열리던 해, 시청 앞에서 목청 터져라 외쳤던 '대한민국'은 내 영혼을 살라먹던 청춘의 초상들이었다. 외로움의 깊은 뿌리를 건드리는 것처럼 그 시절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저자가  명명하는 70년대의 이소룡과 대중문화 1세대는 시차는 조금 있지만, 그 시대의 대중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거의 비슷한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세대들은 미디어 세대들이지만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한 대중문화의 거대한 스펙터클에 감염되는 것은 70년대와 80년대를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격차가 그리 크지 않은 탓이다. 중국 무협영화와 이소령, 라디오 전성 문화, 급격한 변화에 민감하였던  시인들의 텍스트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도시의 욕망들이  감독이자 시인인 유하의 시선으로 다시 읽혀진다. 

 

유하 시인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을 워낙 좋아한다. 그 감성코드와 그리움의 물결들, 시를 쓰기 위해 고투하는 시간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들을 추억하며 그 위에 다시 마음의 길을 놓는 시인의 노래가 밀물듯이 가슴에 들어온다. 누구나 자신의 추억 속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순간들을 부유하며 추억하는 순간들은 과거로의 회귀를 허용한다. 희미한 아련함 너머로 추억들을 짜집기 하다보면 쏟아져 나오는 그리움들, 우리는 누구도 그 그리움에 자유롭지 못하다. 유하의 책을 차마 덮지 못했던 이유였다.

 

삶이란 그 영혼의 백지도 위에 갖가지 색깔을 입혀가는 과정 그 색깔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굴욕과 비굴이 필요한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이 살아온 지금, 그 영혼의 백지도 상태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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