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6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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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로지 '둘'만의 경험알랭 바디우는 사랑이라 말했다. 둘만이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은 서로에게 사로잡히는 이끌림으로 이루어진다. 라캉은 누군가에게 이끌릴 때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그가 이룬 성취가 아니라 그것때문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것'이란 무엇일까? 자신안의 욕망을 대변하는 지시대명사인 '그것' 이란 돈이나 권력, 재산이나 명예등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누군가에게 이끌린다는 것은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잠재된 욕망이다. 따라서 사랑은 둘의 경험이지만 엄밀히 말해서는 잠재된 나의 욕망을 사랑하는 일이다. 지성의 결정체 나르치스와 사랑의 결정체 골드문트의 사랑은 둘의 경험이지만 엄밀히 말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지성과 지혜로 똘똘 뭉쳐져 수도원생들 사이에서도 군계일학이었던 나르치스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외모와 맑은 영혼을 가진 골드문트는 첫 만남에서부터 이끌린다. 철학과 문학, 외국어에도 능통했던 나르치스는 수도원장과 교사들 모두에게 인정받는 최고의 학생이었고 동료생도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은 단연코 골드문트였다. 타인의 운명을 읽을 수 있었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운명이 수도사가 아님을 간파했지만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처럼 지적인 수도사가 되고 싶어했다.

 

그는 골드문트의 본성을 환히 꿰뚫고 있었으며, 서로 대립되는 기질에도 불구하고 그 본성을 아주 내밀하게 이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골드문트의 본성은 바로 그 자신이 잃어버린 또 다른 반쪽이었기 때문이다, -p51

 

나르치스는 타고난 감각으로 골드문트의 출생에 알 수 없는 무엇이 드리워져 있으며, 골드문트의 기억 속에 지워진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그것은 일종의 죄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무희였던 어머니의 속죄양이 되어 수도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강압된 요구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골드문트는 어머니와의 기억을 지워왔다. 나르치스의 집요한 탐색과 질문으로 골드문트는 어머니의 기억을 되찾게 되고 망각의 더깨가 사라지면서 어머니를 향한 갈망이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수도원 마실을 나가 어머니를 닮은 리제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후 골드문트의 정처없는 방황이 시작된다.

 

자유분방하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맘껏 사랑하며 사는 삶이 그에게 열렸다. 어린 소녀에서 유부녀까지 ,만나는 모든 여인들이 골드문트를 사랑했다. 노상강도 빅토르를 만나 살인까지 저지르고 레네를 겁탈하려 한 남자의 목을 부러뜨리고 절벽에 버리고, 골드문트의 행보는 거침없다. 흑사병이 창궐하는 도시를 지나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떠올리고 백작 부인과 사랑에 빠져 감금 당하고 살해 협박을 받기도 하는데 그의 기행은 성모상에서 만물의 속삭임을 듣게 될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건 자네 덕분일세. 자네만은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 가운데오직 자네만을 말일세. 이게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네는 어림도 못할걸세. 그건 사막에서 솟구치는 샘물이요, 황무지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와 같은 걸세. 나의 마음이 황폐하게 메마르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 닿을 수 있는 자리 하나가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자네 덕분일세.’

 

한평생을 잘 짜여진 질서 속에서 최고의 지성인으로 살아 온 나르치스와 방탕자로 삶을 탕진해 오던 골드문트와의 '사랑'은 오로지 둘의 경험안에서만 존재한다. 나르치스의 기도는 골드문트를 향해 있었고 골드문트의 방황은 나르치스를 향한 것이었다. 지와 사랑, 나르치스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사랑은 골드문트 그 자체였고 골드문트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정신적 고향은 나르치스였다.

 

자신의 운명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때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돌아와서 평생 꿈꾸던  걸작들을 완성한다. 나르치스의 얼굴을 한 성 요한 상을 조각하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골드문트의 열정은 나르치스를 사랑으로 이끌었던  '그것'의 모습이다.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죽어가는 골드문트에게 너로 인해 하느님의 은총이 닿을 수 있는 자리가 남아있다는 고백은 사랑은 둘이 하는 경험이지만 결국은 자신안에 깃든  잠재 된 또다른 나를 사랑하는 일임을 의미한다. 사랑의 비밀은 거기에 있다. 둘이 경험하지만 원래 하나였다는 듯이 서로의 가슴에 닻을 내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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