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기억과 함께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여주인공이 신분 상승을 꿈꾸며 들고 간 '안나 카레니나' 책은 테레자의 욕망을 기억하고 있고, 수녀원에서 매일밤 숨죽여 가며 읽었던 로맨스 소설은 훗날 보바리 부인이 꿈꾸던 사랑을 기억한다. 혼미했던 사춘기 시절의 '상실의 시대'에는 사랑과 우정이란 이름의 청춘을 기억케 한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산의 원형을 보존하여 지은 학교라 운치 꽤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삼년 내내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내리느라 두꺼운 다리가 덤으로 남겨졌지만 비가 오면 오는대로 한 편의 수채화가 되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아름다운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원이 있었다. 아름드리나무 아래에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뒹글고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펼쳐 있었다. 그 시절의 책은 아름다운 기억과 함께 했다.

 

<청춘의 문장들> '청춘'이라는 여름을 기억한다. 청춘의 시절 , 김연수 작가를 이루게 했던 모든 것들, 그가 사랑한 시절들과 함께 했던 책과 잠시 머물렀다 사라져간 기억들이 물기를 머금고 반짝거린다. 그 물기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빛과 그림자처럼 쌍을 이루며 존재하는 것처럼 빛나는 청춘안에 고여 있는 웅덩이 같은 고독이다. 그 웅덩이 같은 고독은 어른이 되어서도 떨쳐지지 않는 사소함으로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곤 한다.

 

그 웅덩이 같은 고독은 이백의 [장진주]에서 목메어 불러보는 군불견君不見’ 이 3백잔의 술잔을 들이키게 하는 울분이 되기도 하고 , 쓸쓸한 가운데 가만이 앉으면 떨어지는 꽃잎처럼 두보의 [뜰 앞의 감국 꽃에 탄식하다] 로 한탄되기도 한다. 또 온갖 수수께끼로 점철된 삶을 살았듯이 죽음 역시 그러하였던 최북과 함께 한다. 랭보의 [취한 배]로 읽는 삶의 고단함은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젊음의 밤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때때로 [상실의 시대]를 지나오듯 죽음이 일부처럼 존재하기도 한다. 김연수 작가의 여름은 그런 문학과 함께 하며 공허한 청춘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환한 햇살의 젊음은 아니지만 그것은 환한 햇살을 맞이하기 위해 잠시 몸을 움츠린채 그늘에 머물러 있는 여름이였다.

 

나에게도 청춘은 익기를 기다리는 감처럼 떫은 맛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아름다울지라도 '베르테르효과'를 양산하며 수많은 청춘들의 목숨을 빼앗아가듯 , 모든 아름다움에는 치명성이 따른다. 청춘은 아름답지만 그 치명성을 견디지 못하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 타는 듯한 여름을 견뎌야 서늘한 바람을 맞이할 수 있는 계절의 이치와도 같이 인생의 여름이라 할 수 있는 청춘 역시도 그러하다.

 

청춘을 반으로 접어서 그 시간들을 다시 거닐 듯 읽게 되는 소설이었다.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을 여름이지만, 청춘의 여름날 고여 있던 웅덩이의 고독들이 오소소 일어난다. 그 안에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반짝이며 손을 흔든다. 김연수 작가의 글은 내 청춘의 여름, 그 자체였다.

 

 

 

 

 

-김연수 글 발췌-

 

그해 겨울, 나는 간절히 봄을 기다렸건만 자신이 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깨닫지 못했다. 한 조각 꽃이 져도 봄빛이 깍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빨리 정릉 그 산꼭대기에서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원했다.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 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을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벼렸다.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기억하는 청춘이란 그런 장면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애매한 계절이고, 창문 너머로는 북악 스카이웨이의 불빛들이 보이고 우리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다른 일들을 생각하며, 하지만 함께 김광석의 노래를 합창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건 내가 경험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뭔가에 빠진다면 그건 내 안에 들어온 그 뭔가에 빠져든다는 뜻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소통의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전적으로 내 경험의 공간 안에서 모든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도, 증오도, 행복도, 슬픔도, 모두 내 세계 안쪽 창에 맺히는 물방울 같은 것이었다.

   

때로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 그게 바로 젊음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취하고 또 취해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해가지지 않는 여름날 같은 것, 꿈꾸다 깨어나면 또 여기,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곳, 군대에서 깨달은 삶의 유일무이한 1대 비밀은 그런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만나면 만날수록 괴로워지는 어떤 것,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감미로워지는 어떤 것, 대일밴드의 얇은 천에 피가 배어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스케이트를 지칠 수 밖에 없는 어떤 마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게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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