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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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제목처럼 팔 미터가 넘는 긴 가로 화폭을 따라서 강산은 끝이 없이 펼쳐져 있었다. 눈으로 본 강산과 꿈에 본 강산, 꿈에도 보지 못한 강산들이 포개지고 잇닿으면서 출렁거렸다. 산들이 잦아지는 골짜기마다 마을이 들어섰고,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들이 펼쳐졌고, 들판 가장자리에서 다시 산맥이 일어섰다. 윤곽선을 풀어헤친 산맥은 연기처럼 엉키고 또 흩어지면서 허공 속을 흘러갔고, 기진해서 소멸해가는 산맥들이 하늘 속으로 빨려드는 잔영 너머에서 바다는 시작되고 있었다.바다가 뿜어내는 안개가 먼 잔산(殘山)들의 밑동을 휘감았고, 그 안개 속에는 내가 모르는 시간의 입자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번창했다.-p338  

 

 문학의 아름다움은 삶의 리얼리티를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 있다. 롤랑 바르트가 '현재'라는 시간이 바로 소설이라고 하였던 것은 문학만이 지닐 수 있는 삶의 핍진성(리얼리티)을 가리킨다. 이 말은 곧 문학의 미는 삶의 핍진성을 얼마나 잘 담아내고 있는가가 좋은 글의 척도임을 알 수 있다. 김훈의 글은 바로 이 삶의 핍진을 바탕으로 한다. 문학 용어이기도 한  핍진성은 한마디로 우리의 삶을 이루는 뼈대 , 먹고 자고 싸는 매우 생래적인 일들을 얼마나 치열한 사유의 미학으로 그려내는가에 있다.

 

8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강산무진>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재의 시간들을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병풍처럼 펼쳐지는 배경들은 살풍경하다 싶을 정도로 무심하다. 주인공들 또한 '사납금 구만오천원의 고지를 넘어서 다시 뛰고 또 뛰어서 뛴 만큼만 벌어먹고 산다는 일은 잔혹했지만 선명한.’ 택시업을 하고 있고 <배웅>,  전립선에 걸려 뇌종양 아내를 간호하는 오상무<화장>의 이야기가 처연하게 그려진다. 논문 쓸 능력도 안되면서 만년 대학원생인 오문수는 대학가에서 여대생들과 숱한 염문을 뿌린다.  <뼈> , 비행기 사고로 형부가 죽은 이후 시도때도 없이 생리혈을 흘리며 우는 언니와 이혼 후 유부남을 사귀며 홀로서기를 하는 자매<언니의 폐경>에게서 노년의 쓸쓸한 풍경을  , 자식들이 장성하고 아내와 이혼 후 통보 받은 간암 판정에 혼자 신변정리를 하는 <강산무진>의 주인공이 등푸른 생선을 먹으라는 의사의 권유로 식당에서 혼자 고등어 구이를 먹는 모습에서 짙은 페이소스를 읽는다.  '강산무진도'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산맥사이로 다양한 인간군상이 펼쳐지듯,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현실의 시간들은 김훈의 <강산무진>에서 다소 메마르고 냉정하게 재현되어 흐른다. 

 

2편 <화장>은 같은 제목으로 상영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원작이다.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려질지 모르겠지만 뇌종양으로 투병하는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오상무가 그리는 관념의 롤리타(여성성)이다. 김훈 작가가 그려내는 사유의 미학이 가장 돋보이는 단편이었다. 전립선에 걸려 성기 끝에서 고드름 녹듯 겨우 몇 방울 떨어지는 오줌을 누는 주인공과 항문 괄약근이 열려서 비실비실 흐르는 똥을 싸는 아내와는 대조적으로 그려지는 여직원 추은주는 '빗장뼈 위로 드러난 푸른 정맥과 노을빛 살' 을 가졌다. 자신에게 결핍 된 생명을 추은주라는 관념적 대상을 통해 채워가는 주인공의 눈물겨운 사랑은, 이루지 못하는 꿈을 꾸는 현대인들의 결핍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강산무진도가 무릉도원을 꿈꾸던 이상향을 그려낸 것처럼 추은주는 이상과 관념의 마돈나로서 다가온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

김훈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삶의 핍진성은 노년의 페이소스다. 관조하며 흐르는 소설의 시간들이 이제 폐경이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되어 버린 현재의 시간들과 겹쳐졌다. 오십대에 이른 주인공들에게서 보여지는 육체의 변화와 무력한 단상들은 나도 모르게 큰 숨을 들이쉬게 했고,  조금씩 진행되고 있는 노화의 징후들을 확인케 하였다.  뇌종양으로 마멸해 가는 아내의 육체에 대한 묘사는 너무 리얼하여 생명이 빠져나가는 황량함를 느끼게 했고 그 생명조차도 ' 생명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없고, 이 건너갈 수 없음은 생명현상'이라 말하는 작가의 순응에 슬며시 눈시울이 붉어진다.  노년의 사랑은 관념에 머무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추은주를 향한 사랑조차도, 늙어가는 처지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삶의 편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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