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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과 결혼을 경계짓는 것은 이상과 현실이다. 이상은 미래처럼 추상적이고 결혼은 현실처럼 실제적이다. 사랑에는 이 두 가지 경계가 물과 기름처럼 공존하고 있는 감정이다. 결혼해서 살다보면 이상과 현실이 만나는 지점, 즉 현재와 미래가 충돌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내게도 그랬던 것 같다. 멋지기만 했던, 동화속 백마탄 왕자님인 줄 알았지만 결혼하고 나서 철저히 깨어지는 이상의 파편은 척박한 현실을 환히 비추어준다.
요즘 혼자 앓이하는 드라마가 있다. 결혼한 여자 일리와 두 남자의 사랑을 그린 [일리 있는 사랑]이다. 스토리상으로는 분명 비상식적인 사랑이지만, 결혼한 여성의 사랑과 삶을 너무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운명같은 사랑으로 만나 결혼에 성공하지만, 일리 앞에 던져진 현실은 냉혹하다. 시부모의 갖은 구박과 싸움, 철없는 시동생의 뒤치닥거리와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시누이의 병수발까지 도맡으며 막노동과 다름없는 페인트공을 하는 일리는 그래도 사랑하나로 만족하며 산다. 아니 살려고 했다. 김목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일리의 불행을 먼발치에서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사랑에 빠진 김목수는 일리에게 위로이자 숨통같은 것이었다. 일리와 김목수와의 관계를 눈치채게 된 선생님은 처음에는 분노하지만 어머니마저 치매에 걸리자 일리와 헤어지려 한다. 사랑하지만 일리를 더 가슴아프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부터일까. 일리의 사랑과 현실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두꺼운 경계가 되어 장막을 두른다. 사랑과 현실, 그 가운데에 일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반면, 두 남자를 사랑하는 일리는 사랑과 결혼이라는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눈물의 여왕 장미와 침묵의 왕자 명제
사랑과 결혼의 경계에서 고민하는 장미와 명제의 이야기는 동화속의 이야기를 닮았다. 그러나, 이들은 동화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다. 너무 평범하여 초라한, 화려한 동화속 주인공이 아닌 현실의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한 이들이다. 엄마의 괴팍한 성격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장미와 아버지의 인색함 아래 우울하게 자란 명제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동화처럼 통하는 구석이 많다. 슬픔이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동화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위로하는 버릇도 같다. 동아리에서 만난 명제와 장미는 평범한 연애를 하고 평범한 결혼을 한다. 아주 사소한 말다툼으로 이혼을 하고 다시 만나게 된 명제와 장미는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첫 번째 실패의 경험이 용기가 되어주었지만 라이벌의 등장과 명제의 실수로 불거진 오해는 장미에게 우울증을 심어주고 결론은 다시 이혼이었다.
동화속 주인공들 처럼 결혼하면 행복하고 오래오래 살게 되는 엔딩을 꿈꾸지만 막상 결혼의 현실은 지치고 힘든 삶의 무게를 버티는 데에 있다. 명제와 장미가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으로 깨우쳐가는 사랑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타인의 얼굴에서 “내 안에 들어온 타자는 내 안에서 타자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도록 나를 키워낸다. ”라고 강영안이 말하였듯 장미와 명제는 두 번의 이별을 통해 타자를 위해 짐을 질 준비를 하는 방법을 배운다. 미성숙한 아이와도 같았던 이들은 세 번째의 만남에서야 이상의 파편을 깨고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발견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결혼의 참의미이자 본질이 아닐까한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단순하고 유쾌한 필치의 소설이지만 그 안에 담긴 결혼의 의미는 가볍지 않다. 우리가 흔히 이상적이라 말하는 아름다운 사랑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엔딩이 아니라 행복하고 오래 살기 위해 '나'를 내려놓고 타자의 짐을 질 수 있는 성숙된 과정에 있지 않을까. 바로 그 순간이 이상과 현실이 만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