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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음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영훈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좋던 싫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태어나자마자 페르소나가 씌워진다. 이 벌거벗음에 씌워지는 페르소나를 벗어야만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벌거벗음에 대한 사유는 이 책에서 10편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 전혀 다른 내용의 10편은 ‘벌거벗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유의 알고리즘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창조되었다. 스스로 벌거벗었다는 자각이 없었기에 이들에게는 옷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브가 뱀의 꾀임에 빠져 죄를 지은 후에야 이들은 벌거벗음을 깨달았다. 조르주 아감벤은 이들이 옷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아담과 이브의 벌거벗음은 죄로 인해 초자연적인 옷이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또한 인간은 옷 없이 창조되었고 이는 인간이 본성과는 다른 고유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된다. 옷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초자연적 의복을 입기 위함이라는 역설이기도 하다.
죄로 인한 인간 본성의 왜곡은 육체의 발견과 신체의 벌거벗음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타락 이전에 인간은 신을 위해 존재했고 그렇기에 인간의 육체는 옷이 없어도 ‘벌거벗은’ 것은 아니었다. 옷이 없었던 것은 명백하지만 인간의 육체가 ‘벌거벗지 않았던’ 것은 초자연적 은총이 개별 인간을 의복처럼 감싸고 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빛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입었다. 죄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했고, 그로인해 그의 영광 없는 신체가 비로소 가시화된다. 이는 순수한 육체의 발가벗음이며, 육체의 순수한 기능성을 야기하는 발가벗김이다, 이제 육체는 하나님의 영광 속에 있다는 궁극의 존엄성을 모든 고결함을 상실한다.-p100
위와 같이 벌거벗음의 사유는 창조와 구원, 동시대인, 소송의 K, 유령,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 벌거벗음, 영광스러운 몸, 황소의 굶주림, 세계 역사의 마지막 장까지 이어진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모두 벌거벗은 생명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벌거벗지 않은 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동시대인들의 삶이다. 그러나, 동시대인들에 대한 아감벤의 벌거벗음의 사유는 동시대에 대한 정의를 살짝 비튼다. 동시대인은 시대의 어둠에 확고히 시선을 고정하며 어둠에서 나오는 한 줄기 빛을 지각하는 능력을 갖춘 자를 뜻한다, 이러한 동시대인의 전제는 결국 동시대인은 현재성을 지닐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사물 속의 체험할 수 없는 부분 즉, 도달할 수 없는 현재성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대인이 결코 현재에 안주하거나 스며드는 속성을 지니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 체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동시대인의 삶이다. 그렇기에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살아본 적이 없는 현재로 되돌아가는 걸 말한다.' 이렇게 벌거벗음의 알고리즘은 동시대인에 이어 잠재성에 대한 사유로 연결된다. 벌거벗음이 하나남의 영광을 상실한 결여에 의한 것이듯, 동시대인이 현재성을 결여한 것과 같이 드러나지 않은 잠재성의 비잠재성은 결여이다.
‘모든 잠재성은 동일한 잠재성의 그리고 이 동일한 잠재성에 대해 비잠재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여기서 비잠재성은 단순한 잠재성의 부재나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의 잠재성을 실행시키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실상 모든 잠재성은 항상 되는 힘과 되지 않을 힘, 할 수 있는 힘과 하지 않을 힘인데, 이 특수한 양면성이 인간의 잠재성을 규정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잠재성의 양태로 존재하며, 누군가이며 동시에 아닐 수 있고, 할 수 있는 만큼 하지 않을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에 비해 더 많은 오류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러나 동시에 잠재성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역량을 축적하고 자유롭게 지배할 수 있으며, 이를 능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잠재성은 어떤 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척도이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지 않을 가능성을 유지하는 능력인데, 이것이 인간 행동의 등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불꽃은 불타는 것밖에 못하며, 인간 이외의 생물은 스스로의 고유한 잠재성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생물학적인 소명에 각인된 단순한 행동만을 할 수 있다. 반면 인간은 고유한 비잠재성의 역량을 가진 동물이다.
다소 길지만 본문을 실은 것은 아감벤 조르주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것 같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인간의 벌거벗음은 태초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하여 인간의 본성과 연결 되어 있다. 그래서 신학적 미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씌워지는 페르소나를 벗고 본연의 나(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철학(사유)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동굴에 갇힌 포로가 벽에 드리운 그림자나 흐릿한 사물만을 보며 살아가지만 철학자만이 동굴밖의 실재를 마주할 수 있는 것처럼 〖벌거벗음〗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궁극의 실재를 마주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