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 불멸의 인생 멘토 공자, 내 안의 지혜를 깨우다
우간린 지음, 임대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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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투명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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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환경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온라인이 삶에 깊숙이 자리 잡아 가면서 알게 모르게 생활 모든 면이 온라인화 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속도전을 자랑하며 터지는 속보들과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뉴스피드들을 이제는 충격도 없이 흘려보낼 정도로 무감해 지고 있다. 신문으로만 들었던 뉴스를 이제는 핸드폰만 있으면 페이스북이나 밴드등 다양한 소셜 커뮤니티를 통해서 언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너무도 익숙해진 광경들, 아침 출근시에 스마트폰은 안경보다도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페이스북을 수년째 이용하고 있지만 이따금씩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찜찜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최근들어 친구가 급증하면서 더 자주 그런 느낌이 든다. 벤덤과 푸코가 말하였듯이 나는  '페이스북'이라는 '파놉피콘'(감옥) 에 갇혀 생이라는 과업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감옥의 진일보한 개념으로 우리 사회를  디지털 파놉티콘이라 명명한 바 있다. 과거 푸코의 감옥(판옵티콘)은 한 개인에 의한 일방적인 감시개념이었다면,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현시대의 '디지털 판옵티콘'은 각자가 자발적으로 공론장에 나와 노출증과 관음증을 동시상영하는 개념으로, 모두가 감시자인 동시에 피감시자가 되는 사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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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은 교도소 건립 문제로 시끄럽다. 6.4 지방선거에서 교도소는 최고의 이슈였는데 선거 이후 학부모들이 다시 문제제기를 하면서 교도소는 뜨거운 감자로 재급부상했다. 유권자 신분으로 선거당시에는 침묵하고 있던 학부모들이 난데없이 아이들의 학습권 침해와 청정 교육도시 이미지를 훼손시킨다는 명분을 들고 일어서기 시작한 운동은 일파만파로 세가 커지더니 급기야는 지상파 뉴스와 CTV 뉴스에서도 대서특필 되었다.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님비현상이라는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도소 반대파는 더욱 대담하게 '초등생 등교거부'라는 집단행동까지 불사해 가며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병철 교수가 디지털 파놉티콘시대라고 말했을 때만 하더라도 소셜 커뮤니티를 단순한 개념을 생각했었다. 문제는 이렇게 불거지게 된 '교도소 반대'가 밴드와 카톡, 페이스북으로 확산되면서 일어난 현상들이었다.  SNS는 순식간에 반대 강경파에 장악 되어 갔고 조금이라도 교도소 건립을 찬성하거나 옹호하는 발언이 나오면 순식간에 적으로 간주하며 집단 공격을 퍼부어 댔다. 인신공격은 차치하고 찬성하는 이가 자영업자일 경우에는 불매운동을 벌이며 찬성은 절대악, 반대는 절대선이라는 편가르기가 시작되었다.  심지어 초등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교도소 반대 피켓을 들게 하며 이 추운 날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강요하고는 자랑스럽게 아이의 사진을 밴드에 올려 놓기도 한다.  

   

사실 자식을 키우는 학부모로서 교도소 반대를 외치는 학부모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점점 도가 지나치는 반대 학부모들의 집단행동에 슬슬 거부감이 들었다. 재정 자립도가 낮은 편이고 지방 소규모 도시로서 교도소라는 (정확히는 법조타운이지만) 국가 시설이 들어온다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학습권을 침해한다면서 자신들의 자식을 1인시위에 내보내는 학부모들의 행동이 내게는 오히려 기이하게 여겨졌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교도소 앞 학교를 다닌 나로서는 교도소를 혐오시설이라 기피하며 비난과 욕설을 일삼는 일부 학부모들의 행위에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오랫동안 SNS를 별 부담없이 활용해왔던 터라 교도소 찬반 양론으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할 때 밴드나 페이스북에서 공공연히 교도소 건립을 찬성하는 발언을 해 왔었다. 교도소 반대를 하는 학부모들에게 표적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나는 반대파들의 이분법 논리에 영락없이 늑대우리의 생닭신세가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상털기까지 당해 가족들까지 피해를 입었다. 이 때 나는 처음으로 '디지털 파높티콘'이 무엇인지 뼈져리게 경험해 보았다. 소셜 네트워크(밴드,페이스북,카톡)가 일방적인 소통에 불과할 뿐 아니라 가입과 동시에 모두 감시자이자 피감시자가 되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민주주의의 존립의 기본 전제인 표현의 자유는 '감시'라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의해 저절로 자기검열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현재도 여전히 교도소 찬반 논란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사이버 상의 막말과 비난으로 수십건의 고소고발이 연이어 터지고 있는 중이다. 결국 군민화합을 위한 지역의 대표 밴드는 고소고발의 원천지가 되어 전과자를 양성하는 사이버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라를 통치하고 조직을 관리하며 인간관계를 잘 맺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모두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다.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선생님의 지혜야말로 최선의 답이다. -p75

   

"너희 생각에는 내 머릿속에 온통 정치와 도덕만 들어 있는 것 같으냐? 아니면 정치와 도덕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너희에게 정치와 도덕, 예의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너희가 자신의 삶과 인생에도 관심을 두기를 바란다. 한마디로 너희가 자신의 삶을 더욱 서정적으로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p216 

 

 

 

 바야흐로 21세기 ' 디지털 파놉티콘' 시대 여전히 공자의 사상은 유효할까? 고전적인 것들은 모두 지루하고 상투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시대에 여전히 공자 열풍이 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자의 열풍이 식지 않고 출간 될 때마다 나를 궁금하게 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2500여년이 흐른 지금도 공자의 사상이 유효한 이유... 그것이 가장 궁금했었다. 먼저 이 책은 기존의 고전 공자의 책과는 많이 다르다. 저자가 경제학자라는 점도 그렇지만 더 특별한 것은 기존 공자의 저작들 <논어>,<공자가어>,<사기>,<공자집어>등에서 공자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가필한 스토리텔링 형식의 소설이라는 점이다. 논어 원문을 해석하는 형식이 아니라 삶과 밀접한 문제들을 그렸기에 조금 더 현실적인 공자를 만날 수 있었다.

 

 사회가 점점 복잡다단해지면서 도덕적인 가치들이 흔들릴 때가 있다. 아무리 가치관이 바르게 정립되어 있다해도 때때로 부딪히는 삶의 문제들은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는 가치혼란을 겪곤 한다. 이번에도 나는 또 한번의 가치관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나는 성경책을 읽기 위해 촛대를 훔치는 행위와 같이 목적이 아무리 좋다하여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위는 옳지 않다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아무리 가치관이 변한다해도 보편적인 진리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학습권을 지키기 위해 초등학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 채 시위를 가르치는 부모의 편을 들고 싶진 않다. 공자는 '정치와 도덕과 예의 ' 이전에 자신의 삶과 인생에 더 관심을 가지라고 한다.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자신이라는 중심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다. 공자의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원하는 삶을 사는 최고의 가치이며 공자가 디지털 파놉티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삶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공자의 사상을 관통하는 최선의 삶의 정의다. 중심을 잃지 않는다면 삶의 매 순간을 축제처럼 여기며 살 수 있다. 이것이 공자의 행복론이며, 고전이 지닌 가장 보편적인 가치의 힘이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삶의 기쁨이 숨어 있는 법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선행은 악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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