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 싶지는 않으니까.”

 

한 때 사랑했던 여인에게 통보하듯 받아버린 이별편지, 주인공 나는 이 황당무계한 편지에 알 수 없는 자극을 느끼며 아내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다닌다. 그때까지 주인공은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던 그가 욕실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다가 충동적으로 따라한 행동은 아내를 찾으러 가는 것이었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지내는 집에 매일 밤 불이 켜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 그는 아내가 묵었을 법한 호텔에 머물고 아내가 지나쳤을 듯한 거리를 걷는다.

 

내게는 책에서 읽었던 것을 그대로 따라 해보고 싶은 욕망이 일 때가 있는데 이번에는 위대한 개츠비가 그 대상이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내게 변화를 독려했다. 지금까지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고 싶은 충동적 욕구가 불현듯 솟구쳐 올랐다... 적어도 당분간은 옛날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낯선 이곳에서 나는 아주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

 

나흘이란 시간을 위대한 개츠비처럼 보내고 나니, 때때로 찾아오는 시간의 무력감과 감정의 멜랑꼴리, 타인에 대한 공포가 밀려온다. 게다가 아내 유디트와의 결혼생활에 대한 회상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기억들이다. 죽이지 못해 안달난 부부싸움, 서로 저주를 퍼부었던 기억들, 시간 관념이 전혀 없었던 그녀와 달리 너무 정확했던 자신. 결혼 생활 전부를 환기시키는 이 회상의 그림자에 짓눌리던 그는  [녹색의 하인리히] 를 읽으며 소설의 주인공 하인리히와 자신을 연결하기 시작한다. 자연에서 자라는 하인리히의 성장기로 보이는 소설을 통해 주인공은 위대한 개츠비를 흉내 내었듯이 하인리히에게 매료되며 감정이입을 하며 현실로부터 도망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다 문득 외로워져서는 몇 년전부터 알고 지낸, 그러나 깊은 관계라 할 수 없는 클레어와 그녀의 딸과 함께 세인트 루이스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주인공은 이별을 했지만, 그 이별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이별의 실체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클레어와 함께 하면서도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이별보다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린다. 하인리히와 클레어 그리고 그녀의 딸과의 여행을 통해 타인을 향해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열어보이며 서툴고 나약했던 내면의 자아와 조우한다.

   

 

 

 

비겁하거나 소심해서 경험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자신에게 별 가치가 없거나, 그가 관여 했을 때 행여 거절당할까봐 두려웠을 뿐이지. 어릴 적에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늘 소외당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에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온갖 불안과 동경이 다시 도지고 있어. 어릴 적에 경험했던 것처럼 갑자기 주변 세계가 두 조각이 나면서 전혀 다른 형태의 무엇인가로 정체를 드러낼 것만 같아."

 

'이별'에 대한 자각은 클레어와 함께 한 긴 여행을 통해 깨닫게 되고, 정작 주인공과 아내 유디트를 화해 시키는 장본인은 영화 감독이었던 존 포드이다.  희미했던 자아, 경험하지 못한 자아가 아닌 실존의 자아가 진정한 자아임을 강조하는 존 포드와의 대화로 주인공은 자신의 이별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정처없이 걸었다. 한 사람이 움직이면 다른 사람은 멈춰 서곤 하면서 말이다. 어느새 밤이 되었다.

 

내 안에 들어온 타자는 내 안에서 타자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도록 나를 키워낸다. ”(강영안, 타인의 얼굴) 이별의 주체는 타인이 아닌, 내 안에 들어온 타자이다. 사랑은 내 안에 들어 온 타자의 짐을 짊어지는 나, 즉 성숙한 나를 필요로 한다. 태어나면서 타인의 시선에 '나'를 맞추며 타자화된 자아는 미완의 인격체이다. 사랑과 이별은 미완의 나를 키워주는 마음의 씨앗이나 다름없다. 피터 한트케의 이별여행이 특별한 것은 이별을 통해서 자아를 성장시키고 있는 내면을 향한 여정이란 점이다. 뜨겁고 푸르르던 계절이 거짓말처럼 떠나가고 남은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이 책은 그렇게 이별의 방점을 찍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타자를 짊어지는 것. 이별한다는 것은 내안의  타자를 내려놓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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