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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각종 포털사이트의 헤드라인을 훑는다. 헤드라인만 읽어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기에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는 것이 새삼스레 일상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물론 지면으로 뉴스를 통합적으로 연계하여 사유할 정도의 깊이는 떨어지지만, 그나마 뉴스를 챙겨본다는 것으로 위안삼는다. 나는 개인적(퇴사와 출산, 귀향과 같은) 문제로 한동안 세상과 담을 쌓은 적이 있다. 그당시에는 신문과 TV, 심지어 라디오조차 듣지 않았다. 귀향과 동시에 남편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 삶에서 가장 큰 목적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아이들의 학업과 교육문제로 다시 세상과의 스위치를 ON 한 상황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크면 다시 예전의 그 생활로 돌아갈 생각을 항상 하고 있지만, 하는 일에 따라서 생활패턴에도 변화가 있다보니 사실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한동안 세상과 접촉하고 있지 않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서 접하기 시작한 뉴스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충격 그 자체였다. 그로부터 수년이 흐른 지금이야 뉴스에서 전하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수많은 가십들과 부정확한 루머들에 만성이 되고 있는 중이다. 다만, 세상이 비정상인지 정상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나 역시도 티미해져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알랭 드 보통은 이런 티미한 《뉴스의 시대》를 말한다.
알랭 드 보통은 철학자 헤겔이 주장했듯,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라며 뉴스 타전의 시간대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교회의 시간 규범을 따르고 있다는 점과 한나라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뉴스 본부로 곧장 탱크를 몰고 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뉴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장소는 지구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안방에서 이라크 공습의 현장을 볼 수 있고 아프리카의 전염병 발생현장을 뉴스를 통해 볼 수 있다. 이 수많은 데이터들이 전해주는 뉴스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알랭 드 보통은 뉴스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이 뉴스의 본질적인 면들을 부각시켜 주는 동시에 정확하게는 뉴스가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빛나는 사유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의외로 뉴스가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을 때 오히려 현실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렌즈가 된다고 한다.
사실의 정반대에 있는 것은 편향이다, 진지한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편향은 무척 악명이 높다. 그것은 악의적은 의제, 거짓말, 대중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을 부정하는 권위주의적 시도와 동의어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편향에 대해 좀더 관대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순수한 의미에서 편향은 사건을 평가하는 방법을 뜻할 뿐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기능과 활동에 관한 일관되면서도 근본적인 논지에 의해 인도된다. 편향은 현실 위를 미끄러져 들어감으로써 더 명확하게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쌍의 렌즈다. 편향은 사건이 의미라는 바를 설명하려 분투하고 개념이나 사건을 판단할 수 있는 가치의 척도를 제시한다. 편향을 벗어나는 행동은 그 자체로 지나친 시도로 보인다. 오히려 우리의 임무는 편향된 시각이 생산한 더 믿을 만하고 유익한 뉴스에 올라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대부분이 언론(뉴스)에 대한 적극적인 검열을 민주정치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시각과는 달리 알랭 드 보통은 무엇이건 발언하고 출판하는 언론(뉴스)가 오히려 정치적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진을 빼는 데 '검열'보다 더 교활하고 냉소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이 힘은 사람들 대다수를 혼란스럽고, 따분하고, 정신 사납게 만들어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에 관여하며 이는 가장 중요한 사안의 맥락을 대다수 대중이 한 순간도 붙잡을 수 없도록 무질서하고, 복잡하고, 단속적인 방식으로 사건들을 보도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뉴스와 오랜 시간을 보낼수록 익숙해지게 될 두 가지 감정은 두려움과 분노다.
저자는 이런 뉴스를 원근감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마음속의 원근감은 충격적인 사건을 역사 전체에 걸쳐 인류가 겪은 경험과 비교하는 능력과도 같아서 마음속에 원근감을 갖고 있으면, 우리는 어떤 것도 전정으로 새로운 게 아니며, 아주 일부의 사건만이 진실로 놀아운 것이고, 정말로 무시무시란 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된다고 한다.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소하면서도 복잡한 갖가지 방식으로 많은 것들을 바꿀 뿐이다. 정치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정치의 핵심 영역에서 한 사람이나 한 정당이 단숨에 성취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뉴스는 이제 새로운 것과 혁명을 내건 자극적인 타이틀이 아닌 우리의 일상의 미덕을 다루는 것이 뉴스의 임무로 변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너무 빤하고 흔한 것들이 지닌 상대적인 미덕 혹은 결점을 조명하는 것이 뉴스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또한,
극악한 사건에 매혹되는 우리를 그저 도덕적으로 꾸짖기보다는 그 사건들이 전달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과제여야 한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이미 폭로사회가 된지 오래다. 정치면에서도 극단주의자들이 넘쳐나고 있고 대화는 불가하고 공격적 담론만이 있을 뿐이다. 온라인에서의 세상은 더욱 심하다. 오히려 중립을 지키거나 온화한 대화는 추상적이라 하여 배척하는 분위기다. 이해적 담론보다는 공격적 담론이 더 설득력 있게 어필되고 있다. 한국의 뉴스도 위험수위를 넘어선지 한참 오래이지만, 뉴스에 대한 통찰을 이렇게 알랭 드 보통의 철학적 사유로 만나보게 되니 읽으면서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전에는 정말 뉴스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믿을 수 없는 사건과 사고를 보면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곤 하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세상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 거리감을 지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것처럼 삶에서 원근감을 가진다는 것은 '뉴스의 시대'에 필수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통찰이다. 미국의 도시 빈민 운동가인 사울 알린스키가 '그들은 사회를 바꾸는 데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일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폭로일 뿐 혁명이 아니다.' 라고 설파하였던 것처럼 뉴스는 혁명이 아니다.그저 폭로일 뿐이다. 삶에서 원근감을 배우고 싶다면, 뉴스의 시대를 꼭 읽어보길 권한다.
뉴스가 더 이상 우리에게 가르쳐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