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그릇』은 일본에서 사회파 미스터리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대표작품이다. 작년이었던가.『점과 선』으로 세이초를 처음 만나고는 이후 세이초의 작품을 더 찾아 읽는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비어있는 4초에 집착하며 사건을 해결하고 있는 『점과 선』은 근래 보기 드문 트릭과 서사였기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런 마쓰모토 세이초를 세계문학전집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무척 센세이션하게 느껴지던 부분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추리 장르는 세계 문학의 반열에 놓기에는 너무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장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래그릇』을 다 읽고는 마쓰모토 세이초가 세계문학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기에 넘치고도 남는 작가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충분한 작품이었다.
네온사인으로 휘황한 마천루를 향해 몸부림치는 듯 손바닥을 유리창에 대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여자일 수도 있지만, 한 눈에 남자의 형상처럼 느껴진다. 모래그릇의 책표지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강렬한 손자국이 말해주는 몸부림이 욕망의 집어등을 향한 현대인의 몸짓과 사뭇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도쿄 전차 조차장에서 발견 된 얼굴이 짓뭉개진 신원을 알수 없는 남자의 시체로 강력반에 비상이 걸린다. 전날 밤 근처 싸구려 술집에서 낯선 두 사람의 행적이 포착되고 경찰은 시체가 두 사람 가운데 나이 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종업원들의 증언으로 살해 된 남자가 '즈즈' 발음이 섞여 있는 도호쿠 사투리를 썼고 다른 한 남자가 질문한 '가다메는 지금도 여전하지요? 라는 대화가 유일한 단서이다.
사건을 담당하게 된 형사 이마니시 에이타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최근 누와르 장르의 영화로 지나치게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마초남’과 같은 터프한 이미지가 아닌 바르고 꼼꼼하고 가정적이기까지 한 형사로서는 드문 캐릭터이다. 1960년대작이니 아마도 마초남 형사이미지는 현대영화의 산물이지 싶다. 이마니시 형사는 사건의 폭을 '도호쿠 사투리를 쓰는 가다메' 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수사를 시작하게 된다. 단순하지만 최선이었던 이 수사는 결국 흐지부지 상태가 되고 단서는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아내의 잡지를 보다가 부록으로 있는 ‘컬러지도’의 역이름을 심심풀이 삼아 읽던 중 사건의 중요한 단초가 되었던 ‘가메다’ 지역이 인명이 아닌 지명이라는 점에 착안하게 되자, 수사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동료 형사 요시무라와 함께 아키타 현에 있는 가메다로 출장을 간 이마니시는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누보 그룹'을 만난다.
누보그룹은 기존의 도덕이나 질서와 관념을 모두 부정하고 파괴하는 진보성향을 지닌 예술가들이다. 전후의 혼란스러운 일본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으며 매스컴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는 이들은 모두 삼십대 이전의 젊은이들로 작곡가와 저널리스트, 학자, 극작가, 음악가, 영화관계자들다. 그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인물은 누보그룹의 리더역할이나 다름없는 작곡가 와가 에이료이다. 그의 음악세계는 새로운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대신 다도코로 시게요시의 하나 밖에 없는 사위가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아키타 현에서 ‘누보그룹’을 만난 뒤로 전차 조차장 살인사건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고 전위극단 사무원이었던 나루세 리에코의 자살과 이어 누보 그룹의 멤버인 극작가 미야타 구니오의 갑작스런 죽음과 클럽 보뇌르의 여종업원 미우라 에미코의 연쇄적인 죽음이 한 가지의 교집합 , 누보 그룹과 연결되어 있음을 형사 특유의 동물적인 감각과 예리한 촉으로 파헤친다.
휴가 중 해변가에서 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막둥이가 모래로 공을 만들어 왔다. 모래 감촉이 좋았는지 모래를 꾹꾹 다지고 다져서 동그랗게 만든 공은 모래치고는 야물어보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모래를 통에 담자 단단해 보이던 공이 사르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부서진 모래공을 보며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를 보니 나는 우프게도 그제서야 책의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래 그릇의 의미가 2권을 넘어서도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데다 왠지 모르게 사건의 중심에 모래그릇이 등장할 것만 같았기에 마지막까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을 때는 허무하기까지 했다. 이마니시 형사에 의해 밝혀지는 사건의 전말을 통해서야 아하 !! 그런 거였구나. 할 수 밖에 없었듯이 모래 그릇이란 의미조차 마쓰모토 세이초는 철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것이다. 어쩌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욕망이라는 이름은 모래그릇처럼 담기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담으려고 하면 사르르 부서져 버리는 모래그릇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담기 위해 만든 그릇이지만 담으려 하면 산산히 부서지는 그릇이라니, 무엇이든 다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아내는 방패처럼 얼마나 모순되고 독한 패러독스인가. 마치 자신을 태울 거라는 것은 사실은 모른채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의 마지막과도 같이, 집어등을 향해 달려드는 오징어떼들의 우매함처럼 욕망이라는 전차에 오른 인간은 이 모래그릇처럼 허무하게 바스라지는 운명의 패러독스인 것이다. 표지에 있던
네온사인으로 휘황한 마천루를 향한 한 남자의 몸부림은 책을 덮을 때 즈음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으로 일그러져 있는 누군가의 몸부림을 보는 듯 하다.
1960년대 작품인 《모래그릇》을 읽으면 전후의 혼란했던 일본사회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사회 분위기가 병풍처럼 배경으로 펼쳐져 있고 기차를 타고 지나가는 다양한 지명들의 특성과 특산물들이 시대의 향수가 되어 아련하게 그려진다. 이처럼 세이초가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것은 그가 작품에서처럼 사회 구조 비판에 충실해서가 아니다. 가장 통속적일 수 있는 추리소설 장르를 문학으로 격상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세이초가 그려내고 있는 시대의 흔적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