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생몽사(醉生夢死)라는 술을 아시나요?

마시면 기억을 잊는 술입니다. 영화 <동사서독>에서는 인간에게 번뇌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살인청부업자로 살아가고 있는 구양봉(장국영)에게도 번뇌가 끊이지 않는 것은 사랑의 기억 때문이지요. 사랑을 약속했던 여인이 어느 날 형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배신한 거죠.  사막에 살고 있는 구양봉에게 유일하게 찾아오는 손님이라고는 복사꽃 필 무렵 나타나는 떠돌이 무사 황약사가 전부입니다. 황약사는 백타산에 살고 있는 여자와 사막에 사는 구양봉을 이어주는 매개체역할을 하지요. 이 '취생몽사'라는 술은 형수가 구양봉에게 보내는 선물이랍니다.  사랑을 잊기 위해  

기억을 잊을 수 있는 '취생몽사'라는 술을 마시는 것과

'복사꽃을 좋아했다는 기억만 남기고 모두 잊는다는 것,

어떤 것이 쉬울까요?

 

 복사꽃을 좋아했다는 기억만 남겨두고 모두 잊기로 했다<동사서독>의 대사는 멋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사랑했다는 기억마저 사라져도, 사랑하며 얻었던 감각과 세계가 남는 것이다. 잊혀지지 않는 사랑의 기억은 새로운 사랑을 저지한다. 반면 사랑이 나의 신체에 남기고 간 감각과 체험은 새로운 사랑의 모태가 되어준다. 사랑이 진정 하나의 사건이었다 함은, 사람이 떠나도 이미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이 다른 감각과 세계가 내게 남아 있다는 말인 터이다. - 이진경 / ‘삶을 위한 철학수업중에서

 

 

이진경의 <삶을 위한 철학수업>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억은 사라져도 사랑했던 감각과 그 세계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억을 지우는 술은 마셔봤자 헛일이고 잊기로 애쓰는 것도 사랑앞에서는 더욱 헛일이죠.  기억은 지워도 사랑은 남습니다. 영화 《이터널 션샤인》에서 이미 봤잖아요? 풋~   사랑의 기억을 클리너로 깨끗이 지웠음에도 자석처럼 이끌리고마는 것이 사랑입니다. 절대 지워지지 않는 , 마모되는 기억속에서도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이 바로 사랑이니까요.

 

 

 

 

 다시 동사서독의 주인공 이야기를 해 볼까요.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었냐는 황약사의 질문에  '가질수는 없어도 잊지는 말자'라고 합니다. 웃기죠. 남자에게는 잊으라고 취생몽사를 보내놓고는 여자는 '절대 잊지 말자'라니, 아이러니하게도 구양봉은 그 취생몽사를 마시지 않아요. 대신 이런 말을 황약사에게 전합니다.  '복사꽃을 좋아했다는 기억만을  남겨두고 모두 있기로 했다'고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사랑했던 기억은 그대로 변하지 않는 사실이 되어 추억으로 두고두고 남습니다. 기억은 왜곡되기도 하고 퇴색하기도 하면서 서서히 잊혀질지라도 사랑했던 사실, 그녀가 좋아했던 무언가는 그대로 변함없이 잔상으로 남아있는 거예요. 결국 구양봉의 이 말은 죽어도 못 잊겠다는 독한 역설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추억)은 고정된 풍경이 아닌, 그것을 담는 자의 마음의 모양에 따라 변화되는 액체성의 풍경이라고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에서 유하 감독이 말했나요?  사랑했던 사람이 무언가를 좋아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건, 가슴 깊이 아로새겨진 진한 노스탤지어인 동시에 그녀를 향한 밀어(은밀한 언어)였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이 문장을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지금의 제 삶 역시도 추억에 너무 오랫동안 붙잡혀 있었거든요. 서울에서 반평생을 살다가 타향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보면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는 일이더군요.  조금씩 잊어가다 보면 지금 사는 이곳을 고향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이 없는 것보다는 낫고 잊으려고 하기 보다는 마음 한켠에 불꽃하나 피어놓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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