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미인초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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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발산(力拔山)은 기개새(氣蓋世)요  

힘은 산을 들어 올릴 만하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여도

시불리혜(時不利兮)니 추불서(鰍不逝).

때가 이롭지 못해 추(항우가 타던 명마)는 가려 하지 않는구나.

추불서혜(鰍不逝兮) 가내하(可奈何).

추가 가지 않으려 하니 어찌하리.

우혜우혜(虞兮虞兮)여 내약하(奈若何)!

 

우미인아! 우미인아 ! 그대를 어찌하면 좋으리

 

초패왕 항우가 우미인에게 불러 준 '패왕별희'입니다. 역발산 기개새이지만 유방에게 포위 당하면서 마지막을 예감한 항우는 매우 사랑하여 전장마다 데리고 다닌 애첩 우미인에게 패왕별희 노래를 불러줍니다. 애절함에 눈시울이 절로 붉어지는 노래지요. 노래가 끝나자 우미인은 자결하는 것으로 항우의 사랑에 보답합니다. 이후 우미인의 무덤가에 핀 가녀린 자줏빛 꽃을 우미인초(개양귀비)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시놉시스'가 단순합니다. 별로 꼬여있지도 않고 심플하죠. 등장인물도 두명내지 세명, 이번 소설은 그나마 많은 거예요. 고노와 후지오는 남매지만 서로 핏줄이 섞여 있지 않은 가족이고, 무네치카와 이토코는 남매입니다. 오노는 가난하지만 머리가 좋습니다. 박사 논문을 쓰고 있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노는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습니다. 친자식도 아닌데 아버지 유산을 상속받게 되자 고노는 상당한 부담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유산을 모두 후지오에게 주고 자신은 절에 들어가려 하죠. 이 소설에서 고노는 나쓰메 소세키 소설에 등장하는 이지와 이타사이에 고민하는 진지 캐릭터라 할 수 있습니다. '높고 어둡고 해가 들지 않은 곳에서 화창한 봄의 세계를, 가까이할 수 없는 먼 데서 바라보는 것이 고노의 세계.'라 하는 것처럼 고노는 세상이치에 통달한 달관자와도 같습니다. 유산도 포기하고 중이 되려 하는 것에서도 그가 고매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일본에서는 결혼한 상대에게 '금시계'를 주는 것이 관례인가 봅니다. 혼기가 꽉 찬 이 청춘남녀에게는 후지오가 시계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고노의 동생 후지오를 좋아하는 무네치카는 자기가 시계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후지오는 시인 오노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시계를 오노에게 주려하지요. 그것도 모르는 무네치카는 혼자 열심히 김칫국물만 마시고 있죠. 근데 오노에게는 이미 오년 동안 사귀던 애인이 있습니다. 박사 논문을 앞두고 오노는 후지오의 청혼이 결코 싫지 않습니다. 오년 사귄 사요코와 후지오 사이에서 열심히 밀당을 하는 바람에 두 여인네 가슴만 새까맣게 타들어가죠. 고노는 그런 사실을 알지만, 허울뿐인 그 집을 벗어나려면 오노와 같은 데릴사위가 적당하기에 침묵하죠. 친구 무네치카가 후지오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 여성- 이토코,후지오,사요코-는 전혀 다른 성향의 여성들입니다. 많이 배웠지만 번지르르한 외모를 좋아하는 후지오와는 달리 내면을 들여다 볼 줄 아는 '진실한 여성'의 캐릭터로 '학문도 없고 재능도 없지만 고노의 가치와 내면을 볼 줄 아는 여성 이토코'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순종적인 여성으로 사요코가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서로 대비되는 여성 캐릭터는 우미인초의 전설이 비극에서 비롯된 것처럼 후지오의 비극을 암시하는 복선과도 같습니다. 

 

 

 자존심은 미련을 버지리 못한 사랑을 짓밟는다. -p226

 

 홀연히 삶이 변해 죽음이 되기에 위대한 것이다.- p433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스토리가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진 않습니다. 다른 소설가와는 달리 스토리가 아닌 서술방식이 매우 독특하죠. 나쓰메 소세키의 《우미인초》는 초패왕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비극입니다. 세 남여(고노와 무네치카, 이토코와 후지오 , 오노와 사요코)가 주인공입니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 주인공들을 제외하고 이야기를 이끄는 또 다른 화자가 있습니다.  바로 '붓'입니다. 자신을 숨기지 않죠. 이렇게 등장하는 서술의 붓을 따라 시간과 공간이 열립니다. 붓질의 움직임은 마치 한폭의 선명한 수채화를 그리는 듯, 색을 입히듯, 소설을 그려요. 분명 눈으로 글을 읽지만 정신은 '붓'의 설명을 따라 열심히 그림을 그립니다. 대표적인 글이 바로 우미인초를 설명하고 있는 이 문장이죠.   

   '잠들어 있는 천지에 봄에서 뽑아낸 진한 자줏빛 한 점을 선명하게 떨어뜨려 놓은 것 같은 여자.'그러니까 이 소설은 그림이 되고, 이야기는 색인 거죠. 마치 풀베개의 화공이 시 속의 사람도 아니고 그림 속의 사람도 아닌 듯, 비인정(非人情 초탈) 세계와 인정 세계(현실)의 경계를 가차없이 허물어 버립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 소설에서 그림처럼 읽히는 색다른 소설울 선보이고 있습니다.그림처럼 읽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죠. 이것은 또한 비인정과 인정의 경계를 예술로 끌어올리는 새로운 경지이기도 합니다. 삶이라는 백지 위에 죽음이라는 마침표를 찍기 전 피어오르는 자줏빛 사랑이야기 '우미인초'.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요즈음의 날씨에 딱 어울리는 소설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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