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의 삶은 무기력의 최고봉이었으며, 상실과 고통과 절망의 나날이었으며, 체제의 실패자였으며, 사보타주의 도구이자, 낙오자다. 그 남자의 이름은 마르코 포그, 포그는 아이들이 '똘마니, 바보멍청이'  라 놀리기 좋은 이름이었으나, 자신의 이름자를 줄여  원고라는 뜻 ‘ manuscript’을 줄여서 'M.S포그라는 서명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그의 삶이 현재 쓰여지고 있으며, 아직 완료형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달의 궁전》은 포그의 삶을 찾아 써내려간 글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엄마의 이른 죽음과 잇달은 외삼촌의 죽음으로 세계에 혼자 남겨진 포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센트럴 파크에서 노숙자가 아닌 척 살아가는 지성인이었다.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 도시의 방랑자로 살아가는 그에게 쏟아진 폭우는 그의 삶을 모두 앗아가 버린다. 영양실조와 추위, 고열에 시달리며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죽어가던 그를 찾아낸 것은 친구 짐머의 아파트에서 우연하게 만났던 여인 키티였다. 십만분의 일 있을까말까한 우연의 연속으로 포그는 할아버지 에핑을 만나고 게다가 죽었다던 아버지까지 찾게 된다. <달의 궁전>의 계속된 우연, 이 부분에 대해 폴오스터는 어떤 대답을 할까?

 실제로 폴오스터는 비평가들에게 이런 우연의 연속에 대한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당신의 책은 대부분의 픽션에서 발견되는 인과율보다는 우연의 일치에 의존해서 플롯을 이끌고 나가는데, 최근의 작품인 <달의 궁전.<우연의 음악>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렇게 우연을 사건의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삶에 대해 당신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인식의 결과인가요? 아니면 이런 식의 접근이 미학적으로 좀 더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요?

 

-나는 그동안 우연때문에 평론가들부터 호된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나는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우연은 리얼리티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연의 힘에 좌우되고 있으며, 우리의 삶 전체에 걸쳐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져 아연실색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는 픽션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타당하게 보이지 않으면 죄다 부자연스럽다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해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뚤어진 시각으로 책을 읽는데 너무 많은 시각을 소모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른바 리얼리즘 소설의 일반적인 관습에 함몰된 나머지 현실 감각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이런 소설들에서는 모든 인과관계가 매끈하게 설명되므로, 독특함은 사라지고 원인과 결과가 예측 가능한 세계만 보여줍니다. 책에서 눈을 들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둘러볼 수 있을 만큼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런 리얼리즘이 완전히 엉터리라는 것을 알게 되겠죠. 달리 말하면 진실은 픽션보다 더 기이합니다. 내가 추구하려는 건 아마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만큼이나 기이한 소설을 쓰는 것이겠죠.

 

 

 

당신의 작품에서는 우연의 일치를 사용하는 방식이 다른다는 거군요. ‘매끈하게 넘어가기위한 방편도 아니며. 보편적인 리얼리즘 작가들의 조작된 환상,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겠죠. 당신의 책은 미스터리와 우연의 일치에 기반을 둔 거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미스터리와 우연의 일치가 지배원리로 작동하면서 인과율과 합리성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내가 말하는 우연의 일치란 사건을 교묘하게 조작하려는 욕망이 없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의 수준 낮은 소설들에서 볼 수 있는 기계적인 플롯장치, 모든 일을 매듭짓고자 하는 충동, 등장인물들 모두가 관계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마침내 맞이하는 해피엔딩 등이 바로 그런 예가 되겠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 예측불허의 존재, 인간이 겪게 되는 황당한 경험들입니다. 누구에게든 이런 일은 빈번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철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우연성의 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세계에 속해 있는 거죠.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 본들, 세계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줄곧 이런 미스터리들과 부딪칩니다. 그 결과는 실로 끔찍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코믹할 수도 있겠죠.

 

 

 《달의 궁전》에는 포그 뿐만 아니라 눈이 멀고 다리가 마비된 화가 에핑이 나온다. 그리고 한때 사랑했던 여인을 떠나보내고 살 속에 숨어버린 솔로몬 바버의 이야기도 나온다. 세 명이 주인공인 셈이지만, 세명의 이야기는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일 뿐 모두 같은 내용이다. 인생에서 모두 고독하고 외롭고 방랑자라는 점에서 말이다. 폴오스터는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 바탕을 두고 책을 쓰며 모든 소설은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인생이 지니고 있는 의문을 탐구하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 자신을 관찰하는 행위가 글쓰기였다고 한다. 

 

이 책은 오스터와의 주요 작품들에 대한 소개와 인터뷰 모음집이다. 나에게 소설은 한시적인 장르이기에 소설가 폴오스터가 대중문학에 종횡무진한 작가인줄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 달의 궁전을 읽게 되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글이었다. 나의 내면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고, 아주 오래 전 내 황활한 방황기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지 않나- 세상에서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적나라하게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하마트면 울뻔하기도 하면서 주인공 포그와 함께 철학적 사색놀이에 빠져있었다. 《글쓰기를 말하다》를 통해 작가 폴오스터에게 듣는 생각과 소설적 장치나 그의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우연'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게 들었다. 삶에서 우리에게 우연은 얼마나 발생할까? 며칠 전 추석명절에 나는 이런 우연을 경험했다.  서울에서도 만나기 힘든 친구를 10만분의 1의 우연처럼 , 그것도 경상남도 함양에서 만나다니 , 그때의 놀라움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폴오스터가 말하는 '우연'이 삶의 리얼리티에 가깝다는 주장은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우연이 또 다른 삶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되어주니까. 글쓰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고 말하는 작가 폴 오스터, 그의 삶에서도 이런 우연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가난해서 글을 하나도 쓰지 못했을 때 우연하게 받은 아버지의 유산으로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게 되었고 우연하게 만난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우연하게 딸에게서 삶의 몸짓을 배웠다고 한다. 그에게  '우연'은 문학의 외연이자 삶을 이어주는 끈이다.

 

 

글쓰기를 통해 서서히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해 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p57

 

하지만 폴오스터는 작가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글쓰기를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아요. 젊은이들이 글을 쓰고 싶다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신중하게 다시 잘 생각해 보라고, 글쓰기에서 돌아오는 보상은 거의 없습니다. 돈 한 푼 만져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유명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방구석에 틀어박혀 어떻게 살아남을지 걱정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엄청난 고독의 경지를 사랑하는 취향이 있어야 합니다."

 

<내인생의 글쓰기>에서 시인 안도현이 시를 읽고 쓰는 것은 세상과 연애하는 일이라며 문학은 외로운 자들의 몫이라고 하였던 것처럼  폴오스터가 전해주는 글쓰기 역시도 자신에게 던져진 고독의 몫을 감당할 수 없다면 글을 쓰지 말라고 한다. 역시나 글쓰기는 쉽지 않다. 나에게 글쓰기는 외로움도 뭣도 아닌, 그저 이야기의 날줄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고독이라는 씨줄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삶이라는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서 작가  폴오스터의 글쓰기는 좋은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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