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의 황홀 - 우리 마음을 흔든 고은 시 100편을 다시 읽다
고은 지음, 김형수 엮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평점 :
새벽공기를 마시며 구름을 쫓는 일이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바삐 움직이고 있는 운무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보이고, 생명의 신비에 동참하게 하는 듯 경이로움의 나날이다.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친 나무 아래 소담스럽게 핀 버섯에게서조차 친근함과 생명의 경이를 느끼곤 한다. 자연과 벗한다는 것, 그 말은 어쩌면 시인으로 가는 새벽열차에 오르는 일인지도 ...... 고은 시인의 《시의 황홀》을 만나면서 그런 느낌은 더해갔다. 자연에서 흘러나오는 영감의 세계를 그대로 담아내어 극한의 경지에 이르는 황홀경은 바람이 사람이 되고 구름이 벗이 되고 파도가 님이 되는 시詩 세계에 퐁당 빠지면서 시작된다.
삶이란 그다지 숭엄하지 않고
또 삶이란 그다지 비천하지 않다
하늘에는 거미줄이 자라고
때때로 별빛이 거기 걸리며 내려온다
아무리 큰 소리를 가진 사람도
별을 아무리 아무리 부를 수 없다
<을파소> 일부
《시의 황홀》은 기존의 고은 시와 달리 시인 김형수의 해설로 엮어 고은의 시 가운데 명구 100선을 엄선하여 실었다. 김형수의 시 해설로 고은 시의 함축적인 언어 속에 담겨 있는 시의 진수眞髓를 맛볼 수 있다. 오래 전부터 고은의 시를 사모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고은의 시의 정수를 뽑아놓은 시들을 읽으니 고은의 시세계가 더욱 뚜렷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은의 시는 생명의 원점에서 출발한다. 만물의 무상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밑그림으로 그린 후 삶이라는 본그림을 그리기 위해 채색되는 스케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 한가운데를 뚫고 섬광과 같은 깨달음을 준다. 이렇게 살아있는 자연과 함께 공생한다는 중용의 시각은 고은 시인이 가장 한국적이며 가장 동양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시인이라는 것을 방증함이다.
갓난아기로 돌아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가 왜 없으리
삶은 저 혼자서
늘 다음의 파도소리를 들어야 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 같은 것이 살아서 국밥을 사 먹는다
공동체가 파괴되고 억울한 사람들이 지천으로 널려서 울음 울때 그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을 시인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 했다. (엮은 이의 말)
이번 시집은 마치 하이쿠를 연상시키는 듯 여백의 미를 강조한다. 짧은 운율의 하이쿠가 지닌 장점 그대로 생의 응축과 자연의 아름다운 대비들을 통해 삶의 깊이를 깨닫게 하고 있다. 누군가 좋은 시는 화려한 수사가 필요없이 삶을 깊이 있게 느끼게 하는 시라고 한다. 고은의 시는 그런 면에서 좋은 시다. 이해하기 이전에 감동이 먼저 와 있다. 삶은 곧 아픔이자, 슬픔, 그리고 기쁨이다. 나의 경우에 좋은 시는 삶의 희로애락이 모두 녹아있는 시라 여겨진다. 희로애락 가운데 한가지라도 비어버리면 삶은 균형을 잃어버린다. 기쁜 날이 있으면 슬픈날도 있고 즐거운 날이 있으면 아픈 날도 있다. 이 반복되는 삶의 희로애락에서 섬광과 같은 진리의 찰나를 낚아올리는 것은 시인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다. 고은 시집이 황홀한 이유이다. 이제 곧 누구라도 시인이 되는 계절이 돌아온다. 고은의 시詩 열차에 올라 계절의 정수를 누릴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내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가 될 것이다.
불멸이란 얼마나 슬픈 것인가
이 세상은 부서지는 세상인 것을
<어느 기념비>일부
소쩍새가 온몸으로 우는 동안
별들도 온몸으로 빛나고 있다
이런 세상에 내가 버젓이 누워 잠을 청한다
<순간의 꽃> 한 토막
시인의 소쩍새가 온몸으로 울고 시인의 별들이 온몸으로 빛나는 저 위대한 찰나야말로 고은 식 주술의 순간일 것이다.
가을장마는 미친년 볼기짝이지
욕먹을 데도 없이
집중호우로 쏟아지기도 하고
뚝딱 시침 떼기도 하지
<하늘> 일부
1980년 이래 나는 절대로 구름하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운 사람 하나 없이
하루하루 견디는 일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구름에 대하여> 일부
고은에게 세상이란 문명보다 우선시하는 생명들의 정원 같은 것이라 해도 될 것이다
절간에 울려퍼지는 풍경소리, 집중호우로 쏟아지고 있는 가을장마,
옷소매 떨어진 것을 보면
살아왔구나! 살아왔구나!
<여수 158> 전문
접힌 부분 펼치기 ▼
불멸이란 얼마나 슬픈 것인가
이 세상은 부서지는 세상인 것을
<어느 기념비>일부
소쩍새가 온몸으로 우는 동안
별들도 온몸으로 빛나고 있다
이런 세상에 내가 버젓이 누워 잠을 청한다
<순간의 꽃> 한 토막
시인의 소쩍새가 온몸으로 울고 시인의 별들이 온몸으로 빛나는 저 위대한 찰나야말로 고은 식 주술의 순간일 것이다.
가을장마는 미친년 볼기짝이지
욕먹을 데도 없이
집중호우로 쏟아지기도 하고
뚝딱 시침 떼기도 하지
<하늘> 일부
1980년 이래 나는 절대로 구름하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운 사람 하나 없이
하루하루 견디는 일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구름에 대하여> 일부
고은에게 세상이란 문명보다 우선시하는 생명들의 정원 같은 것이라 해도 될 것이다
절간에 울려퍼지는 풍경소리, 집중호우로 쏟아지고 있는 가을장마,
옷소매 떨어진 것을 보면
살아왔구나! 살아왔구나!
<여수 158> 전문
펼친 부분 접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