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2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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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상잔의 비극으로는 6.25만한 고통은 없을진대 새로 태어나는 생명과 같이 하여 과거의 전쟁은 죽음처럼 망각 되어 가고 있다. 태평양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도 다른 나라에서조차 꺼려하는 욱일승천기를 디자인이 이쁘다며 사진 찍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환한 웃음 사이에는 전쟁의 고통쯤이야 잊혀진지 오래이다. 사실 이 책을 손에 들면서 일본작가가 쓴 전쟁이야기 따위는 읽고 싶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인 메도루마 슌이라 해야 바른 표현일 듯 하다. 이 책 역시도 일본의 삶이 아닌 오키나와인의 삶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일본에 속해 있지만,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인. 이들에게 드리워진 전쟁이라는 상처는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지금은 아름다운 섬으로 관광명소로도 이름 높은 오키나와는 우리나라 보다 더 큰 비극을 품고 있는 섬이다. 작지만 찬란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 독립국가 ‘류큐왕국’이 일본의 메이지 왕국시대에 일본의 여러 섬들을 강제로 편입하게 되면서 류큐왕국도 일본에 편입되었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으로 미군과 오키나와의 전투는 당시 철의 폭풍(鐵の爆風)’이라 불릴 정도로 태평양전쟁 중 일본 영내에서 벌어진 최대 지상전이었다. 이후, 미군의 군정하에 놓이게 된 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과 미국 정상들의 회담으로 오키나와를 미국에 반환하기로 합의하지만, 지금까지도 일본 내 미군시설 면적의 약 75퍼센트가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다. 일본과 미국, 다시 일본에 속하는 와중에 오키나와에 거주하고 있던 오키나와인들은 미군 수용소에 지내며 헐벗고 가난한 삶을 계속해야 했고 일본인들을 위해 가미가제 특공대에 젊은 영혼들을 자살부대로 보내야 했으며 이들은 오랜 세월을 삶의 한가운데 전쟁의 상흔을 늘 옆에 끼고 살아야 했다.

 

#물방울

낮잠을 자다가 다리 한 쪽이 동과(호박 비슷한 타원형 열매) 만하게 부어오르게 된 도쿠소의 이야기《물방울》은 오키나와인들이 겪고 있던 삶의 애환과 전쟁의 상흔으로 평생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살아남은 이들의 아픔을 작가만의 기발한 상상력으로 그리고 있다. 도쿠소의 부풀어 오른 엄지 발가락사이 터진 상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동네에 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이를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과 동과만한 다리가 궁금하여 찾아온 사람도 있고 학교마다 돌아다니면서 전쟁이야기를 하곤 하였던 도쿠소인지라 위문을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리가 부어오르며 의식도 가물가물해지는 가운데 밤마다 군인의 무리들이 엄지 발가락을 빨아주는 환상을 보게 되는 도쿠소는 전쟁 당시 물 한모금으로 다친 동료 이시미네를 방공호에 두고 온 기억을 상기시키며 과거와 현재의 혼몽속에 지낸다. 이시미네를 버려두고 혼자만 살아남은 도쿠소는 가슴 한 켠에 남겨진 이시미네를 향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이시미네 역시 군인의 무리들과 함께 나타나 자신의 엄지발가락 사이난 물방울을 맛있게 빨아먹고 간다. 죽어가던 잿빛의 군인들과 회색빛의 이시미네은 물방울을 마시고 나면 얼굴색이 화사하게 변하고 생생함을 띠게 되는 것을 보며 도쿠소는 알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밤마나 만나게 되는 전쟁의 환영들, 군인들이 엄지발가락을 빨아 물방울을 마실 때마다 도쿠소는 전쟁 한 가운데서 부르짓던 원망과 분노로 뒤덮인 동료들의 울음소리를 기억속에서 재생시키며 울부짖는 밤을 보낸다. 도쿠소의 이러한 고통으로 태어난 물방울은 생명수가 된다. 매일 밤 재생 되는 전쟁의 상흔을 통해 생성된 물방울을 밤마다 전쟁의 망령들이 마시러 오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인 군인들과 이시미네는 도쿠소의 엄지발가락을 빨아마시며 생명과 자연의 서사를 번복하는 것이다. 도쿠소가 이러한 환영 가운데에 있을 때 사촌 세이유는 물방울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도쿠소의 물방울을 민머리에 바르자 털이 나기 시작하고, 마시자마자 힘이 솟는 기분을 느낀다. 세이유는 물방울을 병에 담아 ‘생명수’라 하며 이웃에게 팔기 시작한다. 도쿠소의 상처에서 나온 물방울의 인기는 삽시간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떼돈을 벌게 되는데 도쿠소의 물방울의 양이 점점 줄기 시작하더니 붓기가 빠지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면서 물방울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된다. 물방울을 ‘생명수’로 받아 마시던 이들은 물방울이 더 이상 공급이 되지 않자, 상처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고 세이유는 생명수로 인해 군중들에게 몰매를 맞는다. 도쿠소의 상처는 치유 되지만, 가슴에 남은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도쿠소 가슴 안에서 슬픔의 웅어리를 만든다.

 

#바람의 소리

‘전몰자 위령의 날’을 맞아 8월 15일 종전기념일을 맞춰 ‘구슬피 우는 운가미(두개골)을 취재하러 나온 방송국프로그램의 기자인 후지이는 과거 가미가제 특공대원이었다. 젊다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친구들이 모두 태평양 전쟁 당시 자살 특공대원으로 죽었지만, 출격을 앞두고 절벽에서 떨어져 치료를 받게 되면서 후지이만 살아남게 되었다. 일본을 위해서 , 천황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말을 끔찍히 싫어했던 후지이는 살아남았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친구들의 환영으로 자신의 몸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과거 전쟁이 남겨준 기억들을 되살리며 오키나와 강에서 전우들의 살을 파먹고 살아왔을 틸라피아 떼를 바라보는 후지이는 자신의 온몸 구석구석에 남겨져 있는 친구들의 기억들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환영에 사로잡힌다. 멀리서 들려오는 구슬피 우는 운가미의 소리를 마치 가노의 목소리로 착각하면서 자신이 죽기 전에는 절대 이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단지 살아남아,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가노의 환영을 좇고 있었던 거다.”

마지막 단편 <오키나와 북리뷰>편은 가상의 책에 대한 서평집이다. 조금은 생뚱맞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오키나와의 지성인들을 비꼰 서평집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문학가들이 전쟁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하며 오키나와 역사의 상흔을 끄집어내는 식의 서평집은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서평집만으로도 오키나와 문학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세 편의 단편집은 서로 다른 전쟁의 상흔을 기억하고 있다. 《물방울》은 전쟁의 후유증을 가슴에 안은 채 살아가면서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환상의 리얼리즘 문학으로 펼쳐보이고 있고 《바람의 소리》는 앞바다에 장렬하게 전사한 어린 친구들의 환영을 잊지 못한 채 살아남은 자의 고독과 애닮픔을 담담한 필체로 그리고 있다. 《오키나와 북리뷰》는 오키나와인들이 이러한 전쟁의 상흔을 외면해가며 현실 도피성의 문학과 풍자만을 일삼는 것을 꼬집으며 지성인들의 자각을 일깨우는 여러 편의 서평들을 선보인다. 오키나와를 통해 전쟁이 남긴 역사의 상흔을 되새김질 해보며 우리나라 역시도 기억해야 할 역사의 상흔을 애써 모른 척 하며 외면하는 역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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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2 15: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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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2 17: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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