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한 철학수업 - 자유를 위한 작은 용기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5
이진경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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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철학수업,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이런 말은 사실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제 40이 훌쩍 넘어가고 나니 힘겹게 계속되는 이 삶이 버겁기만 하다. 나를 옥죄는 책임과 의무라든지, 거미줄처럼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 네트워크가 가끔씩 나의 목을 조르는 기분이 들때가 있다.  답답함이라는 씨줄과 영겁의 굴레와 같은 날줄이 교차되어 중년이라는 삶의 옷을 짓는 중이다. 날씨도 한 몫 보태 비가 왔다 안왔다  오락가락하니 감정이 들쑥날쑥하며 널뛰기를 한다. 거기에 밥벌이의 지겨움까지 더해 시종일관 우울의 교향곡을 울려댄다.  나이도 먹을만치 먹었으니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 수도 없는 일, 퍼부어대는 빗줄기처럼 돋아나는 고통의 소름도 범위가 더 넓어지고 있다. 점점 고독이란 물을 먹고  솜처럼 무거워져만 가는 이 삶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지 당최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삶에 그때마다 끼어드는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고통을 잊고 삶을 매끄러운 꿈으로 봉합하기 위한 매일 매일의 그 힘겨운 노력인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삶의 무게라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꿈과 현실의 간극을 좁혀야 한다고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는 근면함이 아니라 그것과 대면하는 약간의 용기, 그로인해 문턱을 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는 '작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자기 스스로 행동하는 것, 거기에 덧붙이면 자기 스스로 하고 싶은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러나, 자유에는 전제조건이 하나 붙는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되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이라는 자유의 역설이 ,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을 알아야 한다는 역설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를 위해선 자신의 자유의지만이 아니라 자신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또한 생각한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이 몸뚱어리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자유롭기 위한 훈련이.    

 

그래서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는 약간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 ‘를 넘어설 용기가.

 

    내 인생을 그래프로 그려본다면  인생의 그래프는 굴곡이 많지 않다. 하지만, 내가 동경하는 삶은 굴곡이 심한 그래프다. 자신의 다리를 먹어치운 고래를 찾아 목숨 걸고 쫓아다닌 <모비딕>의 에이허브 선장처럼,  <타인의 삶>에서 안기부에 일하던 비즐러가 자신의 전부이자 전체였던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유를 위해 권력을 헌신짝처럼 버렸던 그 용기를, 비록 비극이었지만 오대수를 향한 복수만이 목적이었던 삶을 살았던 이우진에게조차, 또는 <창수야>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에게 자신의 전부를 걸어버린 삶조차 부럽다. 나에게는 무언가에 -그것이 정의라 하더라도 - 열정과 같은 몰입이, 정열이, 사랑이, 용기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자유'이다. 삶에서 한 발 내어보는 용기,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는 용기, 사랑이던, 그것이 복수이던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 용기', 모든 것이 용기의 결여였다.  

    

 

 

저자는 삶에서, 만남에서, 능력에서, 욕망에서 우리가 진정 자유로왔는지를 물어보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심연의 자유를 응시하게 한다. 고통을 겪는다거나, 고통의 크기에 따라서 삶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며, 고통을 통해 삶에 물음을 던지며, 고통을 통해 '자유'로와 지고자 할 때, 그때 비로소 고통은 지혜로운 안내자로 찾아온다고, 니체가 ' 나락으로부터, 심각한 질병과 회의의 질병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사람은 새로 태어난다. 낡은 껍질을 벗고, 더 민감해지고 좋은 것에 대한 보다 섬세한 혀를 지니게 된다. 더 천진난만한 동시에 이전보다 백배나 더 영리해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니체 -즐거운 학문)라고 하였던 것처럼, 우리 심연 안에 잠든 '자유'를 깨우게 하는 것은 '삶이라는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요즘은 책을 읽기 전의 나와 몇 년동안 책을 가까이 한 지금의 나와 비교를 자주 하게 된다. 책을 읽지 않았던 시절을 자꾸 떠올리는 것은 책을 읽으니 자꾸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무언의 충돌이 내 안에서 자꾸 일어나는 것만 같아서이다. 삶에 대한 고통도 마찬가지, 단조로왔던 젊은 날의 삶이 그리운 것은 점점 복잡해져가는 중년의 삶이 버겁기 때문이다. 현실의 고통은 모두 과거에서 시작되어 현실로 이어왔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미래, 그 미래에는 유토피아의 미래가 기다릴까? 천만에 틀렸다. 미래역시도 지금과 같다. 방법은 현실의 문턱을 어떻게 넘느냐이다. 그 문턱을 넘게하는 것은 오로지 '자유'라는 한 걸음이다. 그만 징징대고 나를 위해서 , 닥치고 자유하리라~~~!!

 

 

유토피아란 부재하는 세계에 대한 동경이고

그런 그리움에 떠밀려 다니며 만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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