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 다이어리 2 시네필 다이어리 2
정여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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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두 시간 만에 끝나버리지만 이 두 시간 안에 응축되어진 삶의 파장은 한 번의 삶을 경험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정여울은 <시네필 다이어리 1>에서 ‘1인분의 삶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 타인의 삶속에 스며들어가는 통로를 영화라고 표현했다. 참 멋드러진 표현같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이렇게 영화에서 철학이라는 실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은 정여울의 타고난 능력인 것 같다. 1편에서 받았던 그 감동 그대로 2권도 블록버스터들의 영화들로 구성되어 있어 낯설게 느껴지던 철학을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책이다.  

 

철학과 영화의 조합은 다음과 같다.

미셸 푸코와본 아이덴티티

미르치아 엘리아데와 매트릭스

줄리아 크리스테바와슈렉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아바타

미하엘 바흐친과 의형제

한나 아렌트와 타인의 삶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발터 벤야민과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위에서 타인의 삶 속에 스며들어가는 통로라고 하였던 것처럼 정여울은 영화의 주인공들의 삶에 스며들어 철학, 그러니까 ’‘타인의 삶 속에서 인문학의 근원적인 성찰인 자아찾기타인과의 관계맺기와 같은 철학적 사유를 뽑아낸다. <미셀 푸코와 본 아이덴티티>에서는 서구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자기자신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주인공 제이슨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며 미셀 푸코가 자신의 철학을 통해 이 근대성의 탄생 지점을 공략하여 그 확실성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던 것처럼 제이슨의 뿌리찾기를 통해 자아에 대한 근원적인 탐색을 시도하는 것이다.

 

온몸의 세포가 기억한 삶의 흔적, 그 엄청난 분량의 메시지를, ‘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의식에게로 송신한다. 그는 그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수많은 여권과 엄청난 돈을 지녔지만 어딜 가나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보이지 않는 감방 안에 갇혀 살아가야 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에게 주어진 과제가 매트릭스 안에서 지금까지 가져온 시공간의 감각이 절대적이고 유일하다라는 편견을 뛰어넘는 것이라면 이러한 것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하는 철학적 사유의 주제는 마르치아 엘리아데의 신화이다. 폴 리쾨르가 유한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무한하고 본질적인 욕망을 신화라고 하였듯이 매트릭스의 네오를 통해 보게 되는 신화적 모험은 인간의 또 다른 욕망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화적 욕망은 <아바타>로 이어져 제이크 설리를 통해 실현된다. 신화적 사유는 인간 조건을 침해하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것, 타자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각자의 판도라를, 우리가 가진 모든 사유의 재료를 동원해 리메이크해내는 영혼의 교감 능력이 아닐까.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이 능력을, 우리 주변의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재료들 속에서 우리 무의식에 여전히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신화적 사유를 발견해내는 힘을 브리콜라주라고 불렀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인간이란 유한성과 무한성의 두 기둥 사이에 가냘프게 매달려 있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의 세계와 의 세계 사이에서 흔들리며 분열하는 존재, ‘의 이상적인 통합을 추구하지만 매번 실패하는 존재,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유한한 시간의 화살표에 쫓겨 다니며 보내지만, 문득문득 정해진 스케줄의 중력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신화적 시간의 내밀한 원심력을 느끼곤 한다. <매트릭스>의 네오에게 이제 신화적 모험을 떠날 것인가, 세속의 시간에 머물 것인가하는 절박한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장자의 말처럼 타자와의 소통은 날개 없이 나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지금까지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살았던 친숙한 세계를 버리고 트임을 위한 소통의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채움을 위한 비움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비워 네가 자유로이 드나들 존재의 틈새를 만드는 것이다.

    

  

 

정여울의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누군가가 옆에서 속삭여주는 기분도 들고,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 것인양 영화읽기가 곧 삶읽기가 되곤 한다. 과거에는 책만이 타인의 삶을 엿보게 해주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미디어가 책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런만큼 영화역시도 책 못지 않게 우리의 인생을 이해하게 해주는 매체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한 영화를 사색하게 할 수 있는 안내서로서 정여울의 시네필 다이어리는 좋은 길라잡이다. 인문학적 통찰 , 뭐 별거 있나.  남을 알고 나를 알면 인생 끝.

 

본문 ▼ (너무 길어서 숨김)

 

우리가 버린 아브젝트를 우리 안의 창조적 혼돈으로 바꾸는 기술. 그것이야말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여성적 힘, 바로 사랑의 기술일 것이다. 영원히 너의 사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지금은 네가 나를 사랑하지만 내 얼굴이 주름살로 뒤덮이거나 나보다 더 매혹적인 대상이 나타나면 네가 나를 떠날 것이 분명하다는 불안감, 나의 선천적인 결핍이 너의 밝은 미래에 어둠을 드리울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런 것들은 사랑의 아브젝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브젝트를 끌어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고수들이 지향하는 커플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서로의 결핍을 통해, 타자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앓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동키처럼,슈렉처럼, 피오나처럼, 그 어떤 결핍이나 단점도 끝내 사랑의 구실로 변신시키는 연애의 기술을 배운다. 사랑이 원초적으로 품은 불안과 우울, 그 자체가 삶을 아름답게 요리하는 상상력의 에너지원이 되는 순간, 우리의 사랑은 나의 결핍이 도드라질수록, 너의 결점이 유난히 눈에 띌수록, 이상하게도 더욱 완전해지는 즐거운 신비다.

우리는 스스로의 시야에 갇힌 타인을 바라보며 그것이 그의 전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고, 나 자신이 타인에게 비치는 인상에 자주 불만을 가지며 난 네가 생가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야라고 변명하며 하루를 보내곤 한다. 우리는 정말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노력을 포기해야 할까. 우리가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은 우리가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또는 우리가 그의 행동을 어떻게 조심해야 할 것인가같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경험적이며 편파적인 기준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정말 개개인의 이해타산을 넘어 한 인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오직 지구에 거주하지만 여전히 지구의 이방인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지구를 죽이지 않고 지구와 공존하는 방법을 , 아니 지구를 비롯한 이 세계 전체의 거대한 시스템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과 교신하는 방식을 찾지 못한 것 같기 때문이다,

 

 

미하엘 바흐친과 의형제

 

우리는 스스로의 시야에 갇힌 타인을 바라보며 그것이 그의 전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고, 나 자신이 타인에게 비치는 인상에 자주 불만을 가지며 난 네가 생가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야라고 변명하며 하루를 보내곤 한다. 우리는 정말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벗다고 해서 그 노력을 포기해야 할까. 우리가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은 우리가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또는 우리가 그의 행동을 어떻게 조심해야 할 것인가같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경험적이며 편파적인 기준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정말 개개인의 이해타산을 넘어 한 인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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