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몽환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의 추리소설은 빠짐없이 읽게
된다. 개중에는
간혹 실망했던 작품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가 수성하고 있는 ‘최고의
미스터리작가’라는
타이틀에는 여전히 동의한다. 최신작
《질풍론도》에서
기존 추리소설과는 전혀 다른 생물학무기라는 독특한 스토리텔링을 선보이더니 《몽환화》는
일본열도를 패망으로 몰아가고 있는 원자력을 소재로 하여 일본역사와 함께 심도 깊은 문제의식을 선보이는 작품이다.
이 책을 읽기 전 미국으로 이민 간 어느 일본인 교수의
칼럼을 읽었다. 그
교수는 한국에 10년
상간으로 갑상선이 엄청나게 증가한 이유가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원인이라고 한다. 체르노빌
원전폭발 이후로 일본에서 갑상선암 환자수가 100배이상
증가하였으며 후쿠시마 원전은 체르노빌 원전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것이므로 후쿠시마발 방사능의 최소 사거리를 한국의 부산까지로 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방사능의 여파는 사라지지 않고 앞으로도 오백년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글을 보면서 방사능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히가시노의 신작 《몽환화》가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두개의
프롤로그
평화로운 가정을 산산조각 내는
묻지마살인의 한 장면과 가족행사로 나팔꽃을 보기위해 시장에 들리는 단란한 가정의 한 장면이
펼쳐진다. 나팔꽃을
보기 위해 철마다 치르는 가족행사가 지루했던 소타에게 한줄기 희망이 있다면 우연히 만난 이바 다카미라는 소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발개지는 소나기와 같은 순정만을 남기고 떠나가 버렸다.
#금지된
욕망 : 몽환화
시간은 흘러 위의 두 프롤로그의 주인공들과 전혀 다른 수영선수였던
‘리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총망받던
뮤지션이었던 사촌 나오토의 자살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조우하게 된 슈지 할아버지의 초대로 리노는 할아버지집에 찾아간다. 식물학자였던
할아버지가 은퇴 후 꽃을 돌보는 낙으로 지내시는 모습을 보며 리노의 블로그에 꽃사진을 올려주던 어느날, 할아버지가
살해당한 채 집에서 발견된다. 이어
노란 꽃이 핀 화분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리노는 노란 꽃의 향방을 묻는 글을 블로그에 올린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게 되면서 오랫동안 ‘노란꽃’의
비밀을 지켜오던 가모 가문의 요스케 형사와 과거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았던 하야케 형사의 활약과 비밀이 많은 형의 뒤를 쫓으며 리노와 함께
가모는 ‘몽환화’의
진실에 다가간다. 결국
두 개의 프롤로그에서 보았던 묻지마 살인(MM사건)과
나오토의 자살, 슈지
할아버지 살인의 한 가운데에는 ‘노란
나팔꽃(몽환화)’이
교집합 된다.
“몽환(夢幻)의
꽃이라는 의미일세. 그
뒤를 쫓으면 자기가 멸하고 만다고, 그렇게
얘기했어.”
세상의
모든 일에는 원인이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던 밴드의 유능한
보컬이었던 나오토는 금단의 열매를 맛보면서 금지된 것에 열망하게 되고 ‘몽환화의
뒤를 쫓으면 멸하게 된다’는
구전처럼 소설 속 몽환화를 욕망한 사람들은 멸의 수순을 밟는다. 금지된
것을 욕망한 후의 댓가는 이토록 잔인하고 쓰디쓴 과정을 거친다.
#히가시노가
몽환화를 통해 남긴 것.
나는 세상의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믿는다. 소설
속 누군가의 말처럼 ‘사라지는
것에는 사라지는 이유가’ 있다고
믿어 왔다. 그렇기에
대체로 금지된 것을 욕망하기 보다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맞이하여 일본 열도가 슬픔에 잠겨 있는 때에 히가시노의 ‘몽환화’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알레고리이자 금지된 욕망의 메타포이다. 금단의
열매는 언제나 매력적인 법이며 그 댓가는 소설처럼 ‘멸’의
길을 걸었다.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그만큼 일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소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세상에
빚이라는 유산’이라는
말로 책임을 지려 하는 모습을 통해 히가시노가 오랫동안 사회파 추리소설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히가시노가
세상 틈새에서 건져내는 실오라기 같은 한 가닥 희망이야 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리노가
수영의 꿈을 접으면서 느꼈던 지독한 상실감에서, 하야세
형사가 이별 후 느꼈던 지독한 외로움 가운데, 다카미와
요스케 형사가 몽환화의 비밀을 지켜내기 위해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짐들 사이에서, 동일본대지진의
여파로 무용지물 된 원자력 공학도의 지독한 소외감에서 건져 올리는 한 가닥 희망의 한 줄은 바로 “세상에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 라는
말이었다. 슬픔과
좌절에 잠겨있는 일본인들에게 히가시노가 말하고자하는 세상에 남겨진 빚이라는 유산은 불행 틈바구니에서 건져 올리는 , 희망
한 올이다. 어쩌면
난 히가시노의 진면목을 이제야 보게 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