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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0
쥘리앵 그린 지음, 김종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밀란 쿤데라는 현대인의 불안과 혼란의 원인을
‘권태’로
보았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존재인 권태는 음울한 현재 연속의 다른 이름이다. 이 책
《잔해-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0》은
삶에서 작은 균열이 전체의 生(생)에
미치는 순간을 포착한다.
누구에게든
삶에 작은 균열이 찾아온다.
잔해의
주인공 필리프가 센 강을 산책하면서 마주친 한 장면,
한쌍의
남녀가 다투는 하며 여자의 다급한 요청을 뒤로 한 후,
필리프가
겪게 되는 삶의 민낯을 향한 실존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도록 한다.
용기가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획득한 모든 기술과 육체적,
정신적
아름다움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아무리
세심하게 그 힘을 측정한다고 한들,
손을
들어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매달 팔둘레와 가슴둘레를 잰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한들 굳센 정신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영원히 확고하게 정립되었다고
믿어왔던 균형이 강가에서 도둑놈과 몇마디 말을 나누었다는 정말 하잘 것 없는 이유로 갑자기
깨져버렸다.
부유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필리프는 스스로를 항상 남보다 나은 사람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어느 날 찾아 온 삶의 균열은 끊임없이
“내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제까지 삶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목적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던 필리프에게 자꾸만 떠올려지는 물음은 인간실존의
궁극의 물음과도 같다. 계속되는 현실의 권태는 자기를 흠모하는 처형과 애인과의 편지를 아무렇지 않게 공개하는 아내사이에서 갈등하며
'존재'에
대한,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자신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껍데기가 되어주었던 부와 위신, 건강, 외모와 같은 것들이 산산히 부서지게
되자, 결국 잔해가 되어 있는 '자아'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의 껍데기를 벗겨버린 부랑자가
그보다 더 가치있는 셈이다.
책을 읽으면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주인공이 연상되어 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의 주인공은 세상 자체를 '공포'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끊임없이 현실도피를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필리프는 도피와는 다르게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철학적 사색을 한다.
필리프는 사회에서 성공한, 남부럽지 않은 엘리트 계열의 인물로서 사회적 지위가 만들어준 자아가
아닌, 뒤늦게야 실존'이라는 자각을 하며 진정한 내면의 나를 향한 여정을 그린다. 내면안의 고독을 향한 회귀를 통해
이루어지는 필리프의 '삶'을 향한 서사는 어쩌면 필리프 혼자만의 고민이 아닌 우리 모두가 떠안고 있는 각자의 짐이
아닐런지......
다소
지루하게
다소
공감하며
다소 음울하게,
읽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
세상은 다른 질서에 따라 다시
구성되었다.
모든
요소들이 우연과 뒤섞인 거대하고 혼란스러운 군중대신,
그는
자신의 주변이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있는것을 보았다.
한쪽은
공포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축이었고,
다른
쪽은 동일한 감정을 나누어 가진 수많은 미지의 사람들,
그의
형제들이었다.
하지만
인류를 둘로 가르는 이런 간략한 방법이 항상 정당한 것은 아니다.
평화와
마찬가지로 용기는 현대인의 삶에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매우
존경할 만한 인물 중에서도 용감한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며 결코 그런 질문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안개의
한가운데서,
필리프는
물질이 그림자가 떠돌아다니는 영적인 세계만이 살아가도록 내버려둔 채 자취를 감추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그림자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과연 무엇을 찾고 있는가?
아무것도
찾고 있지 않다.
그가
그곳에 있는 것은 물가에 있을 때면 거리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그에게 자신이 과거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끊임없이 말해주었다.
그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삶에는 `자기가
될 수 있었을 사람`이
날마다 자신과 동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필리프는 이 경이로운 존재를 짐작해보았다.
그는
이 경이로운 존재를 자신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마침내 그러한 대체가 완성되었다고 믿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커다란 내적 만족감을 느끼면서 지내왔다.
그러고
나서 세월이 흘러 진실을 깨닫게 된 시간이 왔다.
그
진실이란 바로 멀리서 들려오는 죽음의 최초의 부름이었다.
그가
`되어야
할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필리프
자신의 기억만이 그 유령 같은 존재에 대해 말해줄 뿐,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믿었다는 사실에 혼자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여명이 밝아오면 현재의 밤을 넘어서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결코 실제로 떠오르지 않는 그런 미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