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12년 - 19세기 한 자유인의 기구한 노예생활과 탈출기
솔로몬 노섭 지음, 데이비드 윌슨 엮음, 박우정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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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빌러비드>를 읽고 <노예 12>을 다시 읽었다. <노예 12년은>영화로도 나와 있어 책을 읽고 다시 영화를 보면서 삶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떠올려 보았다. 한 번 뿐인 삶에서 다양한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나는 솔로몬 노섭을 통해서 이 위대함의 산물인 '문학'의 경이로움을 맛보았다. 노예12빌러비드와 비교하여 미국 노예제의 역사라는 거시적인 틀을 스케치 해주는 책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노예 12년이라고 한다면 그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미시적 서사는 빌러비드이다. 북부와 남부의 이념차이는 노예제도가 도화선이 되면서 남북전쟁으로 불거졌고 링컨의 '노예제도' 해방의 전문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 선언문은 이후 미국 독립선언문의 시금석이 되었다.  

 

 

 

 

북부의 자유인으로 태어난 솔로몬 노섭이 남부에 팔려가 노예의 삶을 살면서 느꼈던 은 인간의 삶이  아니었다. 솔로몬 노섭은 12년의 노예생활이라는  개인적인 체험을 글로 남김으로서 노예제도를 통해 겪었던 정신의 무게감과 노예의 삶을 써내려간  체읍의 기록을 남겼다. 솔로몬 노섭을 통해 보는  노예로서의 삶은 잔인함의 옷을 입은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다.  

 

  ‘나는 생존하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다.

   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

 

솔로몬 노섭이 플랫이란 노예로 성이 세 번 바뀌는 동안(노예는 주인의 성을 따르게 되어 있다) 자유인이었었다는 솔로몬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자유인을 고집하다 채찍 세례를 받고 이후 노동’에 익숙하며 생존하기 위한 부차적 삶을 살아가는 솔로몬 노섭은 인간의 본성의 심연을 통찰하고 있다. 자유인에서 오로지 '생존'이 목적인 '부차적 '삶에 길들여져 가면서도 자유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솔로몬 노섭은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 와신상담의 시절을 보낸다.

 

《빌러비드》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인권에 대한 구원의 메세지라면 《노예12년》은 작가 자신의 자전적 고통의 체험을 통해 '인권'이라는 옷을 입은 인간들이 사회적 장치로서 만든 제도 안에서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처럼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사회적 계급과 인권이라는 정치의 페르소나를 쓰게 되어 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보듯이 온난화로 인한 지구멸망으로 생존할 수 있는 마지막 구원열차 안에서조차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건재하다.  '생존'하기 위해 설국열차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마지막 열차칸(하위층)에 탑승한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고 죽이며 '생존'만이 목적인 부차적인 삶을 이어간다. 반면 엔진이 있는 첫 번째 칸(상위층)의 사람들은 부유하고 여유있는 삶을 살아간다. 설국열차안의 질서는 바로 이러한 계급과 차별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첫 번째 칸의 비밀은 마지막 칸에 있던 커티스에 의해 밝혀지게 되는데 첫 번째 칸의 부는 마지막 칸에 있는 사람들의 희생과 노동의 댓가로 유지되고 있다 것이다. 마치 남부의 막대한 부의 축적이 노예들의 피와 땀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명은 가장 하위층의 인간들의 희생과 노동이 있어야만 가능한 설국열차의 판박이인 셈이다. 빌러비드는 모든 사람의 평등과 생명을 이야기하지만 노예12년은 인간 본연의 깊숙한 틈바구니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성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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