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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과거 앞에서,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사건 앞에서 우리는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란 경험한
자만이 통감할 수 있는 아픔이다.
누구나 쉽게 비극을 입에
올리지만,
스스로가 겪어보지 않은들 그 깊디깊은 공허의 넋을
어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다.
책은 다행이도 그러한 것을 체험케 하는 훌륭한
매개체이다..
식민주의적 잔재로 고통 받는 이들의 필독서이자
흑인들의 고전으로 불리우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프란츠 파농은 흑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런 표현을
하였다.
세상의
차별은 흑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차별이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때론
남성이라는 이유로,
때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성소수자로
또는 이방인으로서 ‘차별’은
어디에나 있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기에
흑인에 대한 차별 역시도 일반적인 차별의 일부일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책 《빌러비드》를 읽으면서 미국인이 흑인에게
가해진 학대와 착취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차별과는 전혀 다른 '인권유린'이라는 상상 이상의 고통임을 상기해 보는 시간들이었다. 흑인들에게 노예의
낙인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기억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의 상흔으로 인류문명사에 남겨질 상흔이다. 노예로서의 삶은 인간이 아닌 동물로서의 삶, 주主가 아닌 생존이라는 부차적인
삶으로서의 삶이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이러한 인권 유린 앞에서 동물로서의 생존을 거부한 한 자유인 ‘어머니’로서의
기억이다.
사랑하는 자가 아닌 사랑받는 자라는 뜻의 빌러비드beloved는
어머니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자 마지막 선물의 이름이다.
세상에서
비록 사랑받지 못한 자로 죽었을 지라도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자식은 '사랑받는 자' 일테니까. 그러니까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사랑받지
못하고 떠난 딸을
불러내어 장례식을 치러주는 치유와 위로의 여정이다.
토니 모리슨은
1856년
1월의
어느 날,
켄터키
주의 노예였던 마거릿 가너가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 ’라며
두 살배기 딸을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한 사건을 토대로 노예로서의 삶을 재조명한다.
온
몸의 뼈가 뒤틀리는 아픔을 통해 낳은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는 ‘자유인’으로서
재판 받길 원했지만,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채 '노예'로서 생을 마친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토니 모리슨은 <빌러비드>에서 세서라는 여인을 통해 '노예'라는 부차적인 삶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죽은
아이를 위해 ‘디얼리
빌러비드(몹시도
사랑하는)’
라는 비문을
새기고 싶었던 세서는 비문 새기는 남자에게 몸을 판다. 그러나, 그녀가 주고 싶었던 이름자에는 디얼리가 빠진 네 글자(빌러비드)만 허락된다. 아이에게 마지막 해 줄 수 있는 묘비명조차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삶의 모습이 바로 '노예'의 삶인 것이다. 이후 아기 혼령과 함께 저주받은
124번지에서 어린 딸 덴버와 삶을 연명하는 세서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척박하기만 한 세서의 삶에 십 팔년만의
불청객 폴디의 방문이 아니었다면, 세서는 그 집에서 살아있으되 죽은 사람으로 살아갔을 터......
"내 등에는 나무가
자라고,
내 집에는 귀신이 나오고,
그 사이엔 품에 안은 딸아이 하나밖에
없지만,
더 이상 도망은 안 쳐.
절대로.
이 세상 그 무엇도 두 번 다시 날 도망치게 하지
못해.
난 여행을 한 번 했고 푯값을
치었어.
하지만 알아.
폴 디 가너 그 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쌌어!
내 말 듣고 있어?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단
말이야.
자.
이제 자리에 앉아서 우리랑 같이 식사를 하든지
아니면 우리를 내버려두고 떠나.”
'스위트홈'의
남자중의 하나였던 폴디는
세서의 남편 핼리의 친구였다. 마치 과거의 삶에서 폴 디만 톡 튀어나온 것처럼 세서모녀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폴디가 이들의 풍경에
합류하게 되면서 아기 혼령도 자연스럽게 오두막을 떠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빌러비드'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한 여인을 통해 세서는 자신의 '과거 -고통과 상실의 기억'을 불러내기 시작한다. 너무도 아파서 꽁꽁 묶어 자물쇠를 달아놓은 과거의 상자를 열어젖히자, 멈추어 있던 세서의 기억은 다시 재생된다.
“세월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단다.
세월이란
걸 믿기가 힘들다고.
어떤
순간은 떠나가.
그냥
흘러가지.
또
어떤 순간은 그냥 머물러 있고.
예전에는
그게 내 재기억 때문이라고 생각했단다.
너도
알 거야.
어떤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지만,
또
어떤 일들은 절대 잊지 못하잖니.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그
자리.
자리가
여전히 거기 남아 있어.”
빌러비드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빌러비드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세서의 봉인되었던 기억이 과거처럼 고통에 머물러만 있지 않다는 점이다. 상처를 그대로 놔두면 곪아서 썩어들어가지만, 상처에 메스를 대어 도려내면 새살이 돋는 것처럼 스위트홈의 노예들이 겪어야 했던 백인들의 착취와 학대의 기억과 식소와 핼리외 동료들이 백인의 채찍에 살점이 뜯기며 부르짖었던 기억들이 ,매일 밤 백인들에게 강간당하며 채찍질을 당한 그 순간들에 날카로운 메스로 상처를 드러내었을 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고통에 새살이 돋아나면서 아픔은 서서히 잦아들어 간다. 세서가 빌러비드와 함께 과거를 투명하게 바라보게 되었을 때, '사랑받지 못한 자' 에 머물러 있던 세서는 비로소 '사랑받는 자'로서의 회복을 하게 된다. 자신이 주인인 삶, 그것은 스스로를 사랑받는 자로서, 자신을 '보배'로 여기는 것, 이것은 세상의 모든 이들이 되찾아야 할 인권인 것이다. 물론 토니 모리슨은 노예제도의 가장 큰 희생자였던 흑인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위로의 말이었겠지만, 폴디의 마지막 말 '당신이 보배야'는 바로 당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회복을 권하는 자유의 타전이 아니었을까.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을 내
백성이라,
사랑을 받지 못하던 자들을 사랑하는
자라 부르리라-로마서 9:25